스내커

속도를 줄이고 마음으로 걷는 길

‘순례자의 길’이라고 불리는 산티아고 가는 길.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성 야고보’의 유해가 묻혀 있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이 최종 목적지이다. 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은 여러 갈래인데, 그중 가장 유명한 코스가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해서 걷는 800km의 여정이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는 예루살렘, 로마에 이어 그리스도교 3대 성지로 꼽히지만, 지금 산티아고 가는 길은 종교와 관계없이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도보여행 코스가 되었다.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1986년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겪은 경이로운 체험과 영적 탐색을 담은 작품 <순례자>를 내놓으며 전 세계 독자를 이 순례 길에 오르게 한 것이 큰 계기가 되었고, 더불어 이 길은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마실길, 늠내길, 봄내길, 소풍길… 우리나라도 요즘은 어딜 가도 걷기 좋은 길이 참 많아졌다. 마을의 오솔길, 골목길, 산과 하천을 따라 걷기 좋은 길을 조성해서 어딜 가든 신발만 편하다면 가뿐히 걸을 수 있다. 길 이름은 하나 같이 예쁘고 정감 있어서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좋은 계절엔 한번쯤 걷고 싶은 충동이 들게 한다.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느껴지고 그 바람에 꽃향기도 맡아질 것만 같다.

요즘 걷기 운동은 열풍에 가깝다. 현재 매주 3일 이상 걷기 운동을 하는 사람이 전국적으로 8백만 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다. 덕분에 워킹화 시장도 해마다 30~40% 성장세를 보인다고 한다. 2007년 즈음부터 시작된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의 인기가 시작이었다. TV 인기 예능프로그램 ‘1박 2일’에 지리산 둘레길이 소개된 이후 이 길을 찾는 사람들은 훨씬 늘어났다. 지방자치단체는 사람들의 이런 욕구를 반영해 경쟁적으로 걷기 좋은 길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자기 고장 사람들뿐만 아니라 멀리서 원정 오는 트레킹족에겐 지역 관광 명소도 된다. 몇 년 전엔 마라톤이 꽤 유행했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운동의 트렌드가 달라지니 기업의 인기상품도 지방자치단체의 사업도 달라진다.

걷기 운동은 특별한 기술이나 장비가 필요 없다. 운동화만 신었다면 자연스럽게 생긴 길을 따라 손쉽게 할 수 있다. 위험하고 격한 운동보다 걷기 운동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무리 없으며 오히려 운동 효과는 좋다. 또 뛰면서는 하기 어렵지만 걸으면서는 동행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도 걷기 운동의 매력이다. 부부끼리, 부모자식끼리, 연인끼리, 친구끼리 적당한 보폭으로 마을길을 걷고 숲길을 걷고 물길을 걷다보면 평소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도 한 마디 두 마디 수월하게 하게 되고 서로의 마음을 알고 깊이 이해하게 된다. 갈등은 줄어들고 오해는 풀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개봉하지 않았지만, 죽은 아들의 유해를 안고 아들을 대신해 멀고 먼 여행길을 걷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The Way>는 그런 의미에서 조용하고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을 준다. 영화 속에서 아버지가 걸었던 길은 앞서 말한 산티아고 가는 길이다. 아들은 의사인 아버지에게 이 길을 함께 걷자고 권했지만 사양했고, 아버지는 한가롭게 친구들과 골프를 치던 중 혼자 여행을 떠난 아들이 여행길에서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영화는 보기에 따라서 지루할 정도로 단조롭다. 아버지가 아들이 못 다 걸은 길을 걷는 여정이 전부다. 화면 가득한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고색창연한 도시와 마을이 피로에 지친 우리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홀로 걷는 길에서 동행이 생기고 저마다 사연과 목적을 가진 네 사람이 함께 하는 40여 일의 여행을 느리게 따라가며 치유와 소통의 공간으로 길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도착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대성당이라는 목적지가 아니라 그 곳에 이르는 과정 자체라는 것을. 몸은 부서질 듯 고되지만 어느덧 내면은 길을 떠날 때보다 더욱 단단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걷기 열풍의 한가운데 놓여 있지만 우리 삶의 속도는 좀체 줄지 않는다. 걷는 사람들은 많아졌지만 여전히 뛰는 사람이 많고 다리는 걸으면서도 마음은 뛴다. 우리가 이러는 건 삶의 길에서 늘 초조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과정보다 늘 결과를 집착하다보니 여유를 잃고 나 자신마저 잃는다. 등산을 하면서도 등산로에 핀 풀꽃 한 포기를 예쁘게 보지 못하고 정상이 얼마 남았는지만 계산하고 있는 것과 같다. 함께 출발했는데 앞선 사람들을 보면 초조해지고 뒤에 아무도 없으면 길을 잘못 들었나 두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혼자라고 모두가 길을 잃은 것도 아니고 낙오자도 아니다. 그저 사람마다 속도가 다르고 선택한 길이 다를 뿐이다. 산티아고 가는 길이 외길이 아닌 것처럼. 어느 길로 가도 산티아고에 다다를 수 있다.

이제 걷기는 뜨거운 유행 열기를 조금 날려버리고, 매일 밥 먹는 일처럼 일상에서 자리 잡을 때까지 계속 되어야 한다. 걷는 과정을 느릿하게 즐길 때 나의 지친 내면을 따뜻하게 어루만질 여유도 생기고 강하게 일으켜 세울 용기도 생긴다. 굳이 산티아고에 가지 않아도 된다. 내 주변의 올레길, 둘레길, 마실길 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런 힘을 얻을 수 있다.

전미옥 / CMI연구소 대표, jeon@mycmi.co.kr
– 이 칼럼은 <원자력안전기술원> 사보에서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CMI(커리어 매니지먼트 이노베이션)연구소 대표.
자기계발, 경력관리,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기업과 학교를 대상으로 전국에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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