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로부터...

봄바람은 살랑살랑~ 마음에도 살짝 바람 부는 봄입니다. 이번주엔 그림보러 갤러리도 다녀오고...문화공연보러 예술의전당에도 다녀왔더니...한결 정신도 풍요로워진 느낌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번 주말엔 봄바람 꽃바람 쐬러 나가보시는 건 어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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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정로에서... 전미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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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과 다르지만 괜찮아!

 

만원버스 안이 조용하다. 예전 같으면 힘이 들어 낑낑대는 비명이라도 가볍게 들리고 서로 소곤거리는 말소리라도 들릴 텐데, 많은 사람이 탄 버스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다. 왜 그럴까. 돌아보니 젊은이들은 모두들 귀에 이어폰을 하나씩 꽂고 뭔가를 열심히 듣고 있거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때 갑자기 울린 벨소리에 잠들었다가 깬 50대 중년의 피곤에 절은 목소리가 침묵을 깬다. 소통은 그렇게 시작되는 듯하지만 곧 끊어진다. 나와 너, 나와 그,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소통해야 할까.

 

정신병자가 소통하는 법
지난 2월 18일 폐막한 제57회 베를린영화제. 거기에서 혁신적이고 새로운 영화에게 수여하는 특별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의 우리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정말 특별한 영화다. 엉뚱하고 사연 많은 정신병자들이 모여 사는 한 정신병원에서 형광등, 자판기와 대화하고 스스로를 싸이보그라고 믿는 소녀 ‘영군’과 남의 특징과 재주를 훔칠 수 있다고 믿는 병원의 명물 ‘일순’의 러브스토리다.


문제의 발단은 영군이 자신을 사이보그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밥을 먹지 않는 것. 이 때문에 점점 야위어가는 영군에게 일순은 타인의 능력을 훔치는 능력을 총동원해 ‘밥 먹이기’ 프로젝트를 감행하는 과정이 이 영화의 중심 줄거리다. 자신을 사이보그라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정신병 환자를 다른 정신병 환자가 “그래도 괜찮아!” 하고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모습이다.


이것이 과연 진정하고 정상적인 소통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자신이 정신병 환자가 아닌 정상인이라고 자부하는 보통 사람들의 기준에는 턱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군과 일순의 소통과 이해가 사회적인 잣대와는 무관하게 의미를 갖는 이유는 적지 않다.


일순은 “남의 능력을 훔치려면 며칠 동안 그 사람과 함께 생활하고 그 사람처럼 생각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소통이 방법 중 가장 부작용 없으면서 가장 아름다운 공감의 능력이다. 일순은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그 사람의 세계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사랑을 한다. 사이보그라고 믿는 영군의 세계관을 받아들여주고 심지어 그녀의 환상까지도 공유한다. 그리고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라면서 그녀의 방식으로 삶을 보듬어준다.


그런데 일순뿐만이 아니다. 영화 속 정신병 환자들도 자신들만의 세계를 서로 이해해준다. 너무 겸손해서 뒤로만 걷는 남자 신덕천, 수면비행법으로 하늘을 나는 왕곱단 등의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를 존중해주고 서로의 방식으로 생각해준다.


그야말로 정신병원이 관용의 공간이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는 고정관념만 있는 특수한 공간을 배경으로 소통과 이해의 문제를 독창적으로 풀어냈다는 점, 베를린 영화제가 주목한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그런데 해외영화계의 호평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흥행에 그다지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영화와 관객이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탓일까. 감독과 관객이 소통하지 못한 것일까.

 

자기 안에 갇히지 않는 자유인
우리 사회는 좀체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세계적으로 정보통신이 가장 발전한 나라로 극찬을 받는 만큼 소통의 방식도 대부분 디지털화하였다. 컴퓨터와 휴대용 단말기로 메일과 문자메시지, 메신저 등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소통한다. 이렇게 소통의 도구를 풍성해지고 빨라지고 편해졌으나 인간미는 많이 사라졌다. 얼굴을 마주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더 불편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늘어만 간다. 옆에 있는 사람,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앉은 사람과는 통하지 않으면서, 옆에 있지 않은 사람, 멀리 있는 사람들하고만 통하고 싶은 욕망만 가득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두 귀 틀어막고 대화하는 시늉만 내는 사회다. 많은 사람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조직 사회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뿐 상대의 대답은 들으려는 노력은 너무나 부족하다. 상대가 말하는 동안 다음 차례에 내가 할 말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상대가 어떤 말을 해도 내가 할 말이나 내 입장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심지어 TV의 토론 프로그램에서도 그런 장면이 흔하다. 그러니 대화가 이루어질 리 없다.

말은 뜻을 담는 그릇이다. 그래서 뜻이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아야 한다. 규모가 적당한 말은 기분 좋은 소통이 되고 뜻이 모자라는 말은 잘 헤아려 들어야 한다. 그 말을 옮길 때도 상대반의 진짜 뜻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주어야 한다. 말은 운명적으로 다의(多意)적인 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특히 뜻이 여러 가지를 내포할 경우 잘 가려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사람을 잡을 수 있다.


이러한 말의 성격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자기 세계에 갇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상대방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뜻에 알맞은 말을 쓰기 위해 애를 쓴다. 이해와 공감의 은력은 성격이 아니라 노력의 열매다. 이런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은 소통의 즐거움과 내적 만족감이 크다. 일부 전문가가 지적하는 것처럼 ‘디지털 시대’를 소통의 부재의 주범으로 몰기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혹은 조직마다, 자기 생각에 갇히지 않고 열린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한 이유다. ‘내 생각과 다르지만 괜찮아’ 하는 마음가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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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MI(커리어 매니지먼트 이노베이션)연구소 대표.
자기계발, 경력관리,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기업과 학교를 대상으로 전국에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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