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은 선거에 이기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는 정치적 대의나 신념이 제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의 세계적 석학 위르겐 하버마스가 유럽의 몰락위기는 무능한 지도자, 정치인, 기성 정당들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질타한 대목을 읽으면서
<오나 가나 어느 나라나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이 문제로군>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李여사.

<그 보다도 우리 집, 아니 내가 올해 왜 이 모양이지?>
갑자기 짜증스런 얼굴로 변해버리는 李여사.
남편은 3차례나 수술을 했다.
얼마 전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지금은 미국의 시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계신다.
그래서 미국행 비행기속에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신문을 뒤적이며 여행 같지 않은 여행을 하고 있는 李여사.

옆 자리의 남편은 기내식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는 코까지 골며 자고 있다.
무사태평(?) 아니 무책임, 뻔뻔함이 번들거리는 남편의 생활태도는 李여사를 질식시킬 것 같았고, 이혼을 생각하게 했다.
그럴때마다 발목을 잡아 온 것은 시아버지였다.
자상하고 따뜻하고 젠틀한 시아버지 때문에 남편을 큰 아들인양 보살펴(?) 온 것이다.

남편에게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한 대 갈겨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에잇, 빌어먹을 한 번 때려서 코피라도 터트려 봐?>
생각으로 끝나고마는 희극적 발상.
사실 李여사는 남편의 경제적 실패와 무능에 항상 진저리를 치며 살아왔다. 비극적 삶 속에서 희극적인 요소는 아들과 딸이었지만 큰 아들로 변해버린 남편도 한 몫 차지하고 있었다.

부실한 아들과 가정을 꾸려 실질적 가장으로 힘들게 사는 며느리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시아버지.
<얘야, 너무너무 고맙다. 고맙다는 말밖엔 달리 할 말이 없구나. 정말 고맙다.>
항상 등 다독여 주시며 미소에 무한한 사랑을 실어 보내 주시던 시아버지.
그런 시아버지를 떠 올리며 현장에 도착해보니 시아버지는 거의 산송장이었다.
오로지 산소마스크에만 의존하고 계셨으므로 거의 임종에 직면한 상태였다.
식물인간인양 누워계시든 시아버지는 李여사가 지켜 본 뒤로 사흘 만에 저세상으로 떠났다.
쓸만한 유품은 없을 것으로 여겨 대충 정리해서 태워 버리기로 했다.
옷가지, 책, 벨트, 지갑 등 정말 얼마 되지 않는 유품.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신발 상자만 남아 있었다.
상자 속의 구두는 잘 닦여져 있었다.

그런데 구두 바닥에 무슨 글씨가 보였다.
<아니, 이게 뭐야?>
바닥에 쓰여진 글씨는 사랑하는 李OO.
李여사의 이름이었다.
구두를 들자 그 바닥에 하얀 봉투가 남겨져 있었고 역시 그 봉투에도 李여사의 이름이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쓰여져 있었다.

봉투속에서는 정확히 1만 달러가 나왔다. 1달러부터 100달러까지. 허름한 것도, 아주 새것도 있었다.
분명히 오랜 세월 동안 아주 열심히 모아온 흔적이 남아 있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랑, 부모의 참사랑을 확인시킨 한 장의 봉투.
봉투의 글씨는 차츰 흐려져 보이지 않게 됐다.
봉투는 곧 물방울 다이아몬드로 장식돼 갔다.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명리학을 연구하여 명리학의 대가로 손꼽힌다. 무료신문 메트로와 포커스에 '오늘의 운세'를 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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