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그 놈의 돈과 명예보다 뭣이 중헌디?

▷ 또 한 해가 저문다.세상을 제대로 살 줄 아는 사람은 한 해가 지난다고 해서 더 이상 늙지 않는다.그렇다고 그런 덧없는 세월만 한탄하지도 않는다.다만 얼마나 품격있게 살았는지 곰곰이 깊은 생각에 잠길 뿐이다.오히려 가치없는 시간들을 무수히 흘려 보내지는 않았는지 진지하게 반성할 줄도 안다.나는 세밑이 되면 늘 이런 생각이 자주 들곤 한다.과연 한해 동안 내게 주어진 시간을 충분히 잘 활용했는지 여부가 후회로 남는다.어떤 때는 일 분 일 초를 적절하게 사용한 탓에 시간 부자라고 여길 때도 있었다.한편 어떤 경우엔 넋 나간 채 방심한 상태에서 주어진 시간마저도 활용하지 못해 아쉬워한 적도 부지기수였다.그러나 다사다란했던 한 해를 늘 그렇게 보내면서도 새해를 맞이하는 이 순간만큼은 늘 새롭다.

 

보신각 인근 작은 민속 주점에서 고교 동창생들은 병신년 원숭이해를 넘기기는 것이 아쉬웠는지 시간들을 어렵게 냈다.국정농단으로 인한 연이은 주말 촛불 시위탓에 인근에 설치한 천막들이 걸어 오는 동안 눈에 띄곤 했다.가게 실내 온기는 매서운 겨울철 날씨를 녹여줄 만큼 훈훈했다.가장 명당 자리에는 환갑을 갓 넘긴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들이 벌써 와서 좌석을 확보하고 말았다.그 식탁 위엔 맥없이 속이 텅 빈 술병들만 빨리 치워주기를 바랬으며 이 아재들의 거친 목소리들은 실내공기를 차츰 차츰 먹어 삼켰다.당초 약속 시간이 훌쩍 지났건만 학교를 졸업한지 수십 년이 넘은 이 녀석들은 도통 한 놈도 보이질 않는다.

 

스마트폰 가지고 한참동안 손 장난하는 것도 왠지 쑥쓰러웠다.그래서 일단 백세주와 부침개를 일단 시켜놓고 알바 직원의 계속되는 눈치를 가볍게 통과한다.한 삼십 여분 쯤 지났을까. 인근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녀석이 뒤늦게 등장해 놓곤 갑자기 해외 투자자들에게서 전화가 온 탓에 늦어졌다면서 뱀 허물 벗듯이 슬그머니 딴청을 부린다.드디어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30년 묵은 친구들이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하며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들어 온다.일단 과반수가 참석한 관계로 성원이 된 이상 이것저것 따질 게재가 아니어서 술잔부터 돌렸다.

 

그날 화제는 단연코 건강이었다.대기업에서 만년 부장으로 근무중인 별명이 ‘다람쥐’인 녀석은 얼마 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동맥경화에다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와 당뇨 때문에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며 너스레 엄살을 떤다.잠재력 있는 스타트업(Start-up) 즉, 초기 벤처 기업들만을 골라 투자하는 업무관계상 하루가 멀다하고 갖게 되는 술자리와 투자금 회수와 관련한 엄청난 스트레스 때문에 하루에도 담배를 두 갑 이상 피우기 일쑤란다.그래서 싱가폴 해외근무 신청을 진작부터 해놨는데 그렇게 호락호락 쉽지가 않다며 투덜거린다.다행히 자식이 없는 관계로 회사에서 보내주면 당장 그곳으로 가서 정년을 채운뒤 은퇴하고 싶은데 사정이 여의치가 않은 모양이다.

 

맞은 편 자리에서 아무 말없이 냉수만 홀짝홀짝 연거푸 마시던 변호사 친구가 한마디 거든다.본인 역시 최근에 급성 심근경색 진단을 받았다면서 엄청 지루하고 심심한 생활을 해오고 있단다.한마디로 의외였다.평소에 내성적인 성격인지는 알았지만 2차에 걸쳐 스탠드 수술을 한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갑자기 대기업 부장인 친구가 지금 모시고 있는 임원도 수년 전에 같은 진단을 받아서 이해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맞장구를 친다.갑자기 어수선한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듯 차분해졌다.

 

괜시리 술도 못먹는 처지에 놓인 친구들 앞에서 도통 술을 권할 수가 없었다.그래서 아직 결혼을 안한 그야말로 비혼(非婚)세대로 은행에 다니는 고향이 깡촌 출신인 녀석과 잔을 부딪쳤다.이 친구는 워낙 대인관계가 약한 편인데다 가끔 ‘사오정’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는 다소 엉뚱한 구석이 있는 동창이었다.술잔을 여러 번 주거니 받거니 건네다가 그제서야 겨우 꺼낸 말이 올 연말 금융권 구조조정 관계로 조만간 회사를 나와야 할 것 같다며 볼멘 소리를 한다.알고보니 이미 명퇴 준비를 하고 은행을 다닌 지가 제법 오래됐단다.그나마 처자식이 없는 관계로 퇴직금을 받으면 지방에서 친형이 하는 공구 장사 일을 함께 거둘 거란다.오늘 가까이서 보니 머리 숱이 휑한 걸보면 남들이 보면 한참 형님뻘로 착각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런데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도 아직도 한 녀석이 보이질 않는다.한참이 지났을까.스마트폰이 진동벨 소리와 함께 울려댄다. 아무래도 오늘 참석이 어려울 것 같다는 메이저 증권사 부사장인 친구의 다급한 전화 내용이었다.아직 VIP 고객인 기관 투자자들과 가진 저녁자리가 늦어질 것 같다며 사정 좀 봐달라고 애걸한다.사실 작년에도 늦게 등장한 탓에 술값만 내고 겨우 최면치레만 했을 뿐이었다.사실 연말 사장 승진 인사를 코앞에 두고 한 건이라도 실적을 올려야 하는 피말리는 처지였다.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어쩔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옛날로 돌아간 까까머리 동창들은 갈수록 신통치 않은 몸에 대해서 넋두리 하듯 실컷 풀어 놓고 밤새 취해 버렸다.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았지만 그 겨울 밤 공기만은 내 뺨을 후려칠 만큼 매서웠다.

 

▷ 나도 그렇치만 친구들 역시 대부분 몹시 바쁘게 살아왔다.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어쩌면 아예 뛰어 다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돈 벌랴,아이들 키우랴,공부하랴,집안 일 도울랴 참으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그렇게 늘 시간이 부족했다.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늘 시간타령하다 어느 새 세월만 훌쩍 흘러가고 말았다.집안 일을 도운답시고 나름대로 거들었지만 늘 실수 연발이었고 그나마 돌아온 점수마저 후하게 받질 못했다.회사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부족한 공부 한답시고 잠자는 시간 줄여가며 엄청난 돈 쏟아가며 투자를 해온 것도 가족들에게 미안할 뿐이다.어쩌면 그것이 가족과 나의 성장을 위해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고 그렇게라도 힘들게 번 돈을 제대로 쓰는 것이라고 믿었다.어쩌면 그런 기회라도 갖게 된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아니,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생전 자지도 않았던 낮잠도 청해 보는 시늉도 해봤다.아직도 내게 할 일이 많이 남았다는 사실이 고맙게 들린다.하지만 그 일을 더 잘 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잠시 두 눈을 붙여두고 편한 맘으로 쉴 수 있어야 한다.설사 회사 일이 당초 생각만큼 정리되지 않을 수도 있다.특히 몸이 예전보다 찌뿌둥하거나 몸에 신호가 오거들랑 잠시 하던 일을 내려놓고 산책을 하던지 아니면 인근 병원이라도 달려가서 청진기라도 갖다 들이대야 한다.분명한 것은 젊은 사람이든 나이 든 노인이든간에 건강은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기 때문이다.동시에 주변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큰 선물이기도 하다.그런데 우린 이 사실을 망각한 채 다람쥐 쳇바퀴처럼 살면서 돈 앞에서 쩔쩔대며 살아왔다.도대체 그 놈의 돈이 뭐길래…

 

이 대목에서 예전에 읽었던 글귀가 진정성 있게 떠오른다.‘돈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고,명예를 잃은 것은 많이 잃은 것이지만,건강을 잃은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가 새삼 크게 다가오는 연말이다.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이,명예를 높게 쌓았다고 해서, 공부를 남보다 많이 했다는 것이 인생에서 결코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본다.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으로 인생이라는 장거리 경주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다.비록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성공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고 해도 꾸준히 포기하지 말고 자신만의 길을 우직하게 걸어가야만 한다.그것이야말로 살아가는 진정한 의미인 셈이다.

 

세밑에 만난 고교 친구들처럼 우리 시대 아버지들은 당장 먹고 사느라 한창 일했던 젊은 시절에는 도무지 여유가 없었다.아니, 여태껏 내 몸 하나도 간수 못하고 제대로 쉴 줄도 폼나게 놀 줄도 모른채 그저 속물처럼 돈,돈,돈 타령뿐이었다.어쩌면 그때 알았더라면 아니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반대로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 역시 함께 밀려온다.앞으로 며칠만 있으면 정유년(丁酉年) 새해가 열린다.내년에도 직장에서 꿋꿋하게 살아 남아 필요한 만큼 돈을 벌고 자녀들을 잘 키우려면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더 멀리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쉬는 시간을 무조건 만들어야 한다.그런 다음 혼자만의 장소에서 몸과 마음을 추스려서 다시 한번 인생 역전을 노려야 한다.왜냐하면 이 힘든 시대의 가장들은 충전만 하면 영원히 사는 로봇이 아니기 때문이다.무엇보다 필요한 건 100세까지 강철 체력이 필요한 세상이니까 말이다.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경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