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어른들도 나이를 떠나서 마음이 약간 설렌다.길거리엔 캐롤송이 울려 퍼지고 베이커리와 커피 전문점들은 달콤한 케이크를 선보이며 유혹한다.대게는 가족과 연인은 물론 친구들과 크고 작은 선물을 건네며 정을 나눈다.요즘처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시절엔 캐릭터와 장식을 추가해 케이크 하나만으로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마음껏 뽐낼 수도 있다.당초 예정됐던 미국발 금리인상이 발표된 날 치러진 송년회는 진한 브라우니에 부드러운 커피 크림처럼 달콤하지 않았다.내년도 국내외 경제 전망과 부동산 공급과잉 같은 우울한 소식만 식당 벽걸이 TV에서 연신 들릴 뿐이었다.통째로 빌린 호프집 주인 표정이 의외로 어둡다.홀 직원이 갑자기 출근하지 않은 탓에 음식 준비하랴 주문 받으랴 정신없는 모습이 역력하다.약속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사람들이 점차 모여들더니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늘상 그렇듯이 돌아가면서 간단한 건배사를 외치고 몇 순배 술잔이 돌았다.

 

그날 역시 파도치기도 해봤지만 연말 송년회 치곤 도무지 흥이 나질 않았다.사실 이 자리는 꽤나 이름있는 경영 컨설팅 기관에서 수강한 사람들로 구성돼 수 년째 운영중인 친목 모임이었다.나는 구석에서 소주에다 맥주를 탄 소맥만 홀짝홀짝 연신 들이켰다.그 순간 회장이 왠일인지 오늘만큼은 잔을 씩씩하게 높이 들어 보인다.평소에 말수가 워낙 적어 어떻게 벤처기업을 경영할까 괜한 의구심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오늘은 인생 선배로서 한마디 들려주고 싶다며 분위기를 반전 시키려고 애를 쓴다.본인 나이가 낼모레 환갑인데 돌이켜보면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많은 아쉬움이 남는단다.첫째 자신의 몸값을 높일 것을 주문했다.불확실한 환경속에서 결국 살아 남으려면 스스로 경쟁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단다.둘째로 사람의 그릇은 크기가 아니라 담는 내용물이 무엇이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보통은 그릇의 크기를 강조하는데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을 담는냐에 따라 남은 인생에서 성공이 좌우될 수 있다는 요지였다.마지막으로 돈되는 명함을 만들라는 것이었다.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명함보단 적지만 꾸준히 현금을 창출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란다.

 

▷ 그릇의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 대목에서 인생의 비밀이 담겨진 신비한 그릇을 소개하고자 한다.제나라 환공의 ‘계영배(戒盈杯)’에 대한 이야기다.이 술잔은 ‘잔의 7할 이상이 채워지면 잔이 저절로 비워진다’는 속설이 내려온다.쉽게 풀이하면 ‘철철 넘치게 가득 잔을 채우면 반드시 탈이 생기기 때문에 오히려 잔을 약간 비움으로써 경계하자’는 속뜻이 있다.이 잔은 조선시대의 도공인 우명옥이 술과 여자로 일생을 탕진한뒤 나중에 스승이 건넨 말을 듣고 나서 뒤늦게 깨달아 제작했다고 한다.결국 자신의 운명을 지적해준 스승의 말을 거역하고 나서 뼈저린 반성과 회환 끝에 만들어낸 눈물의 잔이라도 한다.

 

조선시대 거상인 임상옥이 이 ‘계영배’로 술을 마시다가 실수로 술잔을 깨트렸는데 이때 도공 우명옥의 일생도 함께 마감했다는 얘기가 솔솔 들린다.아무튼 여기에서 중요한 교훈은 주어진 그릇의 크기를 알고 살라는 것이다.70%를 채울 때 자신의 그릇과 분수를 안다고 해서 ‘지분(知分)’이라고 했고 또한 ‘만분(萬分)’이라고 했다.특히 욕심을 내지 않았다고 해서 ‘수분(守分)’이라고도 한다.보통 기독교에서는 ‘오른 손이 행한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라’는 내용과도 같은 맥락이다.유교에서도 ‘몸으로 지은 복(福)과 행(行)으로 닦은 덕(德)을 입으로 까먹지 말라’고 경계했다.특히 불교에서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해서 스스로가 행한 일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진정 보시라고 따끔하게 충고한다.

 

▷ 사마천이 쓴 <화식열전>편에는 두 영웅이 출연한다.범려와 백규는 엄청난 재물을 얻은뒤 결국 나중에 기부를 한다.자식은 어디까지나 자식일뿐 그만큼만 몫을 남기고 나머진 세상에 나눠주고 만다.이에질세라 임상옥도 노년에 ‘계영배’의 비밀을 터득해 장사해서 이룬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편안한 여생을 보낸다.사마천은 ‘이들처럼 세상의 이치에 맞게 교묘하게 행동하면 부유하게 살 수 있다’며 지혜를 던진다.그러나 ‘세상의 이치를 잘 몰라 제멋대로 살거나 졸렬하면 부족하게 살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결국 미혹함을 바꾸어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부자(富者)라고 다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가난하다고 다 부족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부자와 가난한 자는 누가 만들거나 빼앗아 갈수도 없듯이 운명적으로 태어나기도 한다.하지만 부자 중에는 항상 부족함에 목마른 일부 부자들이 있는데 사실상 알고 보면 가난한 빈자(貧者)에 속한다고 보면 된다.그러나 항상 여유가 있고 풍족한 사람은 세상의 이치만 터득하면 누구나 가능하단다.이 선택이야말로 진정한 부자로 태어나는 셈이다.

 

최근 꽤 쓸만한 자식이 한 조간 신문에 소개돼 눈길을 끌었다.주인공은 중국의 ‘금수저’ 왕쓰충이 아버지 회사 승계를 거부했다는 내용이었다.최근 왕쓰충의 부친이자 중국 당대 최고 부호인 왕젠린 다롄 완다그룹 회장은 아들이 아닌 전문 경영인을 후계자로 뽑겠다는 것이었다.왕 회장은 “아들에게 승계 계획에 대해 물어봤는데 정작 아들은 나 같은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고 말했단다. 그는 “자식은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 같다.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넘기고 나는 이사회에서 그들의 회사 운영을 보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1988년 설립한 완다그룹은 부동산 개발업체에서 쇼핑몰과 호텔, 테마파크, 영화관 체인 등을 운영하는 그룹으로 현재 자산은 6340억 위안(약 107조원)에 이르는 대기업이다.

 

▷ 내가 믿는 기독교에서는 돈을 비롯한 물질들을 비천한 것으로 여긴다.이처럼 기독교에서는 많은 재물을 소유하는 것에 대해 죄악시하고 있다.그렇다면, 왜 이렇게 기독교에서는 재물을 터부시 할까 궁금해진다.그 이유는 청빈함을 미덕으로 우선시 하기 때문이다.돈의 유혹 앞에서 뿌리치는 것을 어쩌면 자랑으로 여긴다.다시 말하면 물질적 풍요와 쾌락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왜냐하면 자신이 그 물질에 지배를 받는다는 생각이 크기 때문이다.그러나 유대인들은 항상 율법에 따라 스스로 규율을 지킨다.그래서 그런 믿음 때문에 풍요나 쾌락에 절대로 빠지는 법이 절대 없다.자신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서 그 어떤 부나 쾌락도 쉽게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탈무드>에서는 ‘바닷가에서 발을 굳건하게 딛고 서 있으면 흔들림이 없지만 불안정하게 서 있으면 파도에 휩쓸린다’라는 내용이 나온다.당장 우리 주변에선 재물의 유혹 때문에 복된 인생에서 즐거움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 모든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뒷태가 왠지 쓸쓸해 보이는 회장의 말처럼 그릇의 크기에 따라 담을 수 있는 내용물도 달라진다.물론 담을 수 있는 양 또한 달라지겠지만.술이나 물 같은 액체를 담을 수 있겠고 한편 간단한 음식물도 담을 수 있다.또한 아파트를 비롯해 상가나 전답 같은 부동산을 담을 수도 있겠고 아니면 골동품이나 보석 등을 담을 수도 있고 아니면 주식이나 예•적금, 보험, 펀드, ELS, ETF, 선물, 옵션 같은 파생 금융상품들로 채울 수도 있다.어떤 사람은 많이 담기도 하겠지만 조금밖에 못 담을 수도 있겠고 어떤 사람은 아예 담지 못할 수도 있다.
 

돈도 그렇다.제아무리 많이 담으려고 해도 일정한 수준이 넘치거나 시간이 지나면 줄줄 새어 버린다.이 신비의 그릇에 오래도록 머물게 하고 싶다면 아니 피땀 흘려 모은 돈들이 썩지 않은 상태로 고여 있으려면 우선 재료가 좋아야 한다.게다가 많이 담으려면 그릇이 커야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비록 초기엔 작은 크기 일지언정 수만 번 손질끝에 조금씩 키워 나가다 보면 많은 양이더라도 결국 담을 수가 있다.아무튼 부자와 가난한 자는 누가 주거나 빼앗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결국 스스로가 정성껏 힘을 다해 담을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왜냐하면 자신의 밥 그릇은 이미 하늘이 정해줬으니까 말이다.한평생 하루 세끼 먹고 사는 일이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윤국열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키움에셋플래너 경제교육 본부장
•경실련 상임집행위원 / 대전참여연대 집행위원
•법무보호복지공단 사회성향상 교육위원
•대전시 시민행복위원회 위원
•ING life 부지점장 / Allianz Life 지점장 / TNV advisor 본부장
•대전대학교 경제전문가과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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