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남은 세월 ‘뭘 먹고 살래’ 물으면

▷ 벽걸이 달력에 빨간색 수성 펜으로 동그라미를 쳐놓고 일찌감치 시간을 비워놨다.예전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참석하곤 했던 문중 시제(時祭) 전날 분위기는 종전이나 다름없이 분주했다.이른 새벽부터 음식을 준비하는 종가집 며느리들의 손놀림은 매우 익숙해 보였다.한쪽에선 먼지가 수북히 쌓인 재실 구석구석을 청소하느라 북적거렸다.곳곳에서 처마 밑 거미줄을 제거하고 나무기둥 밑에 개미들이 움뿍 파놓은 틈을 메우고 있었다.늦은 오후부터 문중 어른들이 전국에서 회의를 위해 삼삼오오 몰려들자 일손들은 상차림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음력 시월 상달에 지내는 시젯날에 참석하는 문중 인원이 해가 갈수록 줄고 있단다.흔히들 시제라는 하면 5대 이상의 조상 산소 앞에서 후손들을 서로 확인하며 동시에 불안한 미래에 대한 축복을 얻어내기 위함이 원래 취지인데 그마나도 여건이 신통치가 않은 모양이다.사실 말이지만 최근 국정농단으로 국가가 어수선 한데다 믿었던 경제마저 수 년째 불확실성만 커져 가고 있으니 문중 행사도 그 영향을 피해 가질 못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의 번영을 위한 집행부의 헌신은 매우 존경할 만했다.

 

시제를 앞둔 전날 재실(齋室)에 모인 많은 종손들 가운데 아저씨뻘인 아는 형님이 어깨를 툭 쳤다. 종손들의 연세가 워낙 연로한 탓에 말도 못 붙이고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에서 무척 반가웠다.언제나 검게 그을린 구리 빛 피부는 만날 때 마다 광채가 번쩍였다.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입심 역시 인근 양짓마을에서 알아주는 걸쭉한 사내였다.날마다 정확하게 담배 두 갑을 피우지만 오히려 얼굴 피부가 탱탱한 걸 보면 나름대로의 비결이 있는 듯 싶었다.집에서 몰래 효험있는 약이라도 달여 먹는 것인지 아니면 건강한 소들과 생활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쨋든 미스터리였다.학벌은 좋지 않았지만 공기 좋은 산자락 밑에서 예전엔 제법 큰 규모의 목장을 운영했던 어엿한 사장님이었다.아저씨는 워낙 가진게 없는 탓에 농협에서 가까스로 대출금을 얻어 소 다섯 마리로 시작했다.소처럼 우직한 동갑내기 부부가 한눈 팔지 않고 일한 결과 목장 규모가 날이 갈수록 커졌다. 얼마 전까지 인근에서 소 100여 마리를 사육하는 큰 규모 목장을 운영했으나 지금은 나이와 건강을 고려해 대폭 줄였다.

 

오래 전부터 문중에서 그의 소문이 자자했다.이유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자식처럼 기르던 소가 늘면서 당연히 목장이 협소해졌다. 그래서 주변 맹지 같은 토지를 알음알음 사들일 수 밖에 없었다.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실수요로 구입한 토지가 대박이 난 셈이었다.인근에 대규모 아파트가 입주하면서 하룻 밤새 엄청난 자산가로 변모하고 말았다.생각치도 않게 투기 목적이 아니라 오로지 목장을 넓히려고 땅을 사들였는데 엄청난 행운이 따라왔다.조상님이 도운 탓인지는 몰라도 일년 내내 예정된 문중 행사에는 늘 적극적인 편이다.그런데 얼마 전 다른 고민이 생겼단다.이번엔 느닷없는 LH의 토지수용 때문에 추운 겨울에 이사를 할 생각에 걱정이 앞선단다.지금껏 소 키우면서 이사만 세 번째라고 들었는데 이참에 자식들은 농장을 그만두라는 말에 어림도 없다면서 확실히 선을 긋는다.

 

▷ 양짓마을에서 포도밭까지는 그렇게 멀지는 않다.평균 어른 속도로 십 여분 걷다보면 2000평 남짓되는 포도밭이 나온다.매년 포도의 수확 시기가 다가오면 변함없이 그곳을 방문해 구입해 온지 오래됐다.평소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성실하다.농부도 직장인 못지않게 자신만의 스케쥴을 소화하기엔 하루 해가 짧은 모양이다.사실 그 포도밭은 할아버지때부터 물려받아 현재는 손자가 운영해오고 있다며 인근 부동산 사장에게서 들은 기억이 난다.현재 포도밭 주인의 할아버지는 원래 머슴이었다고 한다.주인에게서 여러 해 동안 일한 대가로 받는 새경을 모아서 지금의 토지를 매입했단다.이 포도밭 말고도 몇 군데 다른 토지도 있다는 말도 들린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대(代)를 잇고 착실히 관리한 탓에 지금까지 별탈없이 3대에 걸쳐 포도농사가 가능했다는 점이다.포도 밭을 구입하기 위해 주인 사연을 알게 된 부동산 사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충 이랬다.지금도 과하다 싶을 만큼의 금액을 제시해봤자 어림도 없다는 듯이 그저 웃고만 만다.사실 포도만 생산해서는 그렇게 큰 돈이 안된다.그래서 농한기엔 아내는 틈틈이 식당 설거지와 마트 계산원으로 일하고 남자 역시 집짓는 현장에서 생활비를 번다.분명한 것은 대대손손 내려오는 포도밭 만큼은 절대로 팔 수 없으며 앞으로 자식에게 물려 줄 생각이란다.그 주인 말대로 머슴이었던 조부(祖父)가 주인을 잘 모신 덕분에 다른 토지도 공짜로 건네 받았단다.그러나 절대로 티 내지 않고 얼마 안되는 일당에도 겸손하지만 그나마 셈도 밝지 않은 편이다.

 

▷ 돈 문제는 평생 고민이다.매달 통장에 들어오는 월급을 보면서 흐뭇해 하는 직장인들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다.그렇다고 갑자기 재테크한다고 나서봤자 원금이라도 지키면 그나마 천만다행이다.직장 일하랴 저금리 시대에 돈도 불려야 하니 참으로 시간도 부족하고 실력 또한 뒤쳐진다.좋은 대학을 나와서 월급 많이 주는 대기업에 취업해 돈 많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유일한 탈출구였던 시절도 예전이나 가능했다.특히 집안사정은 형편 없었지만 머리 하나만은 똑부러진 시골 출신들에게 매우 이상적인 모델이었다.요즘처럼 ‘N포 세대’에는 결혼 자금마저 부족해 결혼하지 않는 비혼(非婚) 세대들이 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세상이다.최근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학자금 대출을 받고 취업한 대졸자 가운데 72%가 지난해 소득이 적어 대출상환을 유예 받았다.원래 학자금 대출 원리금은 취업후 소득이 발생하면 상환해야 하는데 지난 2015년 기준으로 연간 1865만원보다 적게 벌면 상환이 유예된다.그런데 문제는 상환기준 이하의 대출자 비율이 2012년 68.7%에서 매년 70% 이상을 넘고 있다는 점이다.결국 대학을 어렵게 졸업해도 좋은 직장을 구하기 힘들어지고 턱걸이로 취직을 한다고 해도 저임금 때문에 대출금 상환에 또다시 허덕이는 실정이다.

 

그 뿐인가.지금의 최고 스펙이라고 하는 로스쿨을 졸업한 변호사들도 학교를 다니면서 받은 엄청난 대출금과 이자를 갚느라 쥐꼬리만한 수주금액 앞에서 남는 게 없는 형편이다.문제는 저성장이 계속되면서 내년에도 1인당 소득이 3만 달러 달성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지난 10년째 2만 달러를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작년 기준으로 2만7900달러에 갇히면서 2013년 기준으로 38개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인 3만2400달러에도 크게 밑돌고 있는 형편이다.국회 예산정책처가 내놓은 경제전망을 보면 2018년쯤이나 돼야 1인당 GDP가 3만 달러대 진입이 가능하다고 전망했지만 그것도 그때 가봐야 알 수 있다.정부 발표에 의하면 선진국이 2만 달러에서 3만 달러로 진입하는데 소요된 시간이 평균 8.2년 걸렸다면 한국은 무려 12년만에 달성이 가능하다는 계산이다.하지만 요즘처럼 국내외 불확실성이 높고 저성장이라는 덫에 걸린 한국경제의 상황을 봐서는 도무지 앞날을 기대할 수 없어 답답할 뿐이다.

 

 

▷ 요즘에 오래 사는 게 꼭 축복은 아닐 듯 싶다.은퇴후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져야 제대로 ‘완전 은퇴’라고 할 수 있다.노후준비를 그렇게 만만하게 봐서는 절대로 안된다.기껏해봐야 일정한 소득이 발생하는 30~40대는 전세를 포함한 집 마련을 포함해 자녀 교육비와 생활비만으로도 빠듯한 게 요즘의 현실이다.하지만 고령화는 어쩔 수 없는 대세다.그렇다고 마냥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이 대목에서 지난 주말 재실에서 만난 아저씨가 화장실 옆에서 담배 피우면서 해준 말이 생각난다.“나이 60을 넘으니까 이젠 돈도 소용 없어.그나마 자식들 취업해서 먹고 사니까 그마나 다행이지.문제는 토지 보상금을 농협도 예치해 놨어도 별로 쓴 일이 없다는 거야.자식들은 일하지 말고 여행이나 다니라고 하는데 촌놈이 평생 소 키우는 일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어야지.그렇다고 사지 멀쩡한 놈이 마냥 놀 수는 없는 노릇이고… 돈 조금만 있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거야.조카, 너무 돈,돈,돈 하지 말어.얼마나 산다고…” 사실 그의 말이 옳다.소 도둑놈 처럼 생긴 그가 무심코 내뱉은 말처럼 작은 생각만으로 충분히 노후를 보낼 수 있다.다만 조건은 있다.미리 준비해 놓고 기대치를 낮추면 된다.그러면 얼마든지 행복질 수 있는 법이다.왜냐하면 행복은 각자 누리는 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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