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재벌가의 후계구도

청명과 곡우 사이에 서초동에 사무실이 마련됐다. 빌딩 숲에 둘러싸여 완전한 명당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가금계포란형(假金鷄抱卵型) 이라고는 할만 했다.

<이곳에서 크게 발전할 인물들이 나타나겠지.>

그 중심에는 방여사, 강박사, 공선생 등이 있을 것이었다. 행복, 사랑, 건강·복(福)·덕(德), 아름다움, 착함, 명예, 부(富) 등 좋은 모든 것을 어떻게 해서 내 것이 아닌, 우리들의 것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지혜를 짜 모으는 것이 과제였다.

 

서초동에 앉게 된 사무실의 배경을 설명하고, 반드시 잘 되도록 하기 위한 준비 자세라고 할 만한 자료를 찾아서 프린트 했다. 그리고 인연들에게 돌렸다. 그 것은 재벌의 탄생과 후계구도에 관련된 것이기도 했다.

「입춘이 지나고 무신년(戊申年)이 되면서 조(趙)회장의 노심초사함은 더욱 심해지는 듯 했다. 꽃샘추위가 한창인데도 알 수 없는 열기마저 느꼈다. 며느리의 배는 불러왔지만 속도가 너무 더디다고 조바심을 냈다. 애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산모보다 힘들듯했다. 6월 중순으로 잡혀있는 손주의 등장은 그룹의 미래와 맞물려 있었다. 조회장은 대운의 흐름이 좋게 흐를 것에 크게 안도 하면서도 기대, 충분, 불안 같은 것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형님이 계셨더라면…>

지난해 손주가 들어서기 전 돌아가신 형님은 생전에 며느리에게 좋은 아들 낳기를 신신 당부 했다. 형님은 한량이었지만 어떤 측면에선 앞을 내다 본 기인이기도 했다.

 

생전에 형님은 동가숙 서가취했다. 대개는 기생집이었다. 군왕처럼 행세하며 꽃다운 여자들 틈에 푹 파묻혀 살았다. 한 곳에서 몇 년씩 눌러 앉은 경우도 있었지만 몇 개월 만에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했다. 형님이 옮길 때 쯤 되면 그 집은 기생집으로서의 명가의 반열에 합류했다. 그런 곳에선 형님의 애들이 커 간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렇지만 한 번도 시끄러운 다툼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더욱이 애가 확인된 경우는 없었다.

어떻든 형님 주위에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이 들끓었다. 그 중에는 호리꾼들도 많았다. 형님은 풍수지리나 관상사주로 이름난 사람들과의 교분도 두터웠다. 형님은 특히 도자기 같은 골동품, 고서화 등의 문화재 수집에 광적으로 매달렸다. 마음에 드는 물건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남의 무덤을 파거나 문화재 같은 것을 도굴해 온 호리꾼들과의 거래로 감옥을 간 적도 있었다. 부산의 동래를 비롯, 마산, 진주, 경주, 광주, 전주 등에 명가를 만들면서 전국을 누빈 형님에게는 걸레, 왕초, 산태공,(山의 무덤을 낚시질 하듯 한다고 해서) 대왕마마 등의 별명이 붙어 다녔다.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명리학을 연구하여 명리학의 대가로 손꼽힌다. 무료신문 메트로와 포커스에 '오늘의 운세'를 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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