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가지 군상(群像)들을 대하다 보면 우리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적이 걱정될 때가 있다. 인의예지를 숭상한다는 유교적 전통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는지 의문이다. 그 옛날 자랑스러웠던 동방예의지국의 모습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 

  # 서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 지하철에 80세 정도로 추정되는 노부인이 탔다. 사람들은 그 노약자를 넌지시 보고 있으면서도 애써 외면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무슨 시름들이 그리 많은지, 학생, 청년, 아주머니, 아저씨 어느 누구도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듯했다. 그러자 저만치 떨어져 앉아 있던 70세 다되어 보이는 노신사가 자리를 양보하겠다며, 노부인에게 그 쪽으로 오시라는 시늉을 하며 일어섰다.
  약간 붐비는 오후, 한 할머니가 서 있는 노약자 석에 어떤 젊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초노의 신사가 그에게 “당신 노약자이십니까?”하고 물어보았다. 그 여자는 대뜸“나 임신했어요.”라고 쏴붙이며 눈을 흘기며 일어났다. 피장파장이다.

  # 약주를 드셨는지 조금 불그스레한 노인이 노약자 자리를 차지한 젊은이에게 일어나라고 다그치자 그 자는 들으라는듯이 중얼거리며 내렸다. "돈도 내지 않고 공짜로 타고 다니는 것들이.." 보아서는 아니될 장면, 들어서는 아니될 말을 들은 셈이다. 눈을 닦고 귀를 씻었다는 옛말이 생각났다.
  아마도 그 젊은이는 그가 타고 다니는 지하철을 누가 건설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가 괄시하고 있는 그 어른들이 밤잠 설치며 먹을 것 먹지 않고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지하철은 그 청년의 자식, 손자들을 거쳐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타고 다닐 것이다. 오늘날 고령자의 지하철 무임승차를 어제와 오늘의 유산으로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내일의 부채가 될 것으로 생각할 것인가? 이 문제는 윤리와 가치관에 따라 각각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오늘은 어제가 있었기 때문이고, 내일은 오늘이 있기 때문에 어우러지는 것이지 동떨어져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 다음 늙지 않을 젊은이가 어디 있으며, 옛날에 젊지 않았던 노인이 세상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학교에서 가르쳐온 도덕과 윤리는 그저 암기력을 시험하기 위한 절차에 불과하였는가? 시험만 치고 나면 곧바로 잊어버려야 경쟁력을 쌓을 수 있는가?
  외국 신문에 이런 부끄러운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격식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 예의범절은 복잡하지만 이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나 관계를 형성해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서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의범절이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르몽드 '11.7.31, kdi email news) 이 기사는 한국에서 예의범절이 인간의 도리를 지키기 위한 토대가 아니고, 경쟁력을 위한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의와 범절은 타율적으로 강요되거나 하나의 위장의 수단이 된다. 강요된 예의, 위장된 범절이란 그저 거래관계만 끝나면 바로 벗어버려야 하는 거추장스러운 굴레가 아니겠는가?  큰소리로 악을 쓰며 하는 맹세가 진정한 충성이 아니듯이, 90도 이상 몸을 구브리고 하는 절에서 진짜 예의를 찾기 어렵다.
  우리 속담에도 "광에서 인심난다"고 하듯이 경제가 이만큼 성장하였으면 남도 생각하고 어려운 사람도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심성이다. 그런데도 인심이 더 각박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중산층이 무너져가면서 사회를 조화시키는 완충지대가 없어지고 있기 때문인가?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급변하는 환경에서 누구든 빈곤계층으로 계층으로 추락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까? 과정보다도 결과만을 생각하며 이룩한 고속성장의 부작용일까? 아니면 민족반역자들이 애국지사, 독립투사로 둔갑한 그 씻을 수 없는 처참한 역사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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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감독원에서 증권제도연구실장, 조사부장, 조사연구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미시간 주립대 객원연구원, 이코노미스트, iweekly 편집위원을 역임하였으며 성도회계법인 부회장, 현재 선인장학재단 이사,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인, 비즈니스 워치 금융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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