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나를 낳아라!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다가가기도 하고 돌아서기도 하면서 나의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 나는 내 아이들을 위해서도 내 자신을 완성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내 자신을 위대한 방식으로 사랑할 때 나도 사랑의 결실인 임신을 하는 것이다.”-니체 

차라투스트라에게 새로운 삶의 창조는 나의 어린아이를 임신하면서 시작되며, 그런 어린 아이를 임신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 삶을 사랑해야 된다. 지금의 삶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미래의 삶은 임신되지 않는다. 지금과는 다른 미래의 삶을 임신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삶을 사랑해야 한다. 임신은 현재지만 임신을 통해 출산되는 어린 아이는 미래다. 미래를 담고 있는 어린 아이를 임신하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의 삶을 온 몸으로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에게도 임신은 언제나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그는 종종 이렇게 묻는다. 너는 네 미래를 낳을 수 있는가? 너는 새로운 너 자신을 낳을 수 있는가? 인간은 위버멘쉬를 낳을 수 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언제나 위버멘쉬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여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만큼 차라투스트라는 새로운 나를 임신하고 출산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변신을 시도해왔다. 이런 변신의 과정에는 언제나 여인이 숨어 있다. 차라투스트라에게 여인은 창조를 위한 수단이다. 목적은 언제나 어린아이다. 지금과 다른 나를 낳기 위해 여인이 필요한 것이며, 여인은 임신을 통해 새로운 어린 아이를 낳기 위해 산통을 마다하지 않고 새로운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 자신이 태어날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산모가 되어야 하며 해산의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 142). 산통 없이 어린 아이는 태어나지 않는다. 전통도 극심한 진통 속에서 새롭게 세워진다. 진통 없는 전통은 새로운 생각의 임신을 가로막는 구습에 지나지 않으며 발목을 잡는 걸림돌에 지나지 않는다. 위대한 창작은 모두 엄청난 고통 속에서 진통을 체험한 사람만이 이루어낼 수 있는 출산이다. 고통을 겪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낳을 수 없다. 삶은 고생(苦生)하면서 고통(苦痛)을 체험해야 고생(高生)할 수 있다. 자신이 먼저 창조하고 싶은 미래의 아이를 임신하지 않고서는 그들을 출산할 수 없다. 내가 새로운 나를 낳기 위해서는 우선 기존의 나를 죽여야 한다. 쓰디쓴 죽음을 허다하게 경험해보아야 새로운 나를 임신할 수 있다. 너희도 너희 아이들을 보고 싶다면 너희가 직접 낳도록 하라. 그러나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네 자신의 삶을 사랑해야 아이가 나오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기존의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것으로, 스스로 자기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의미다. 차라투스트라는 언제나 말한다. “무엇이 내 삶을 유지시키는가? 그것은 임신이었다.” 이전과 다른 생각의 임신이 생각지도 못한 생각의 자손을 출산한다. 생각지도 못한 생각의 자손이 출산하는 과정이 곧 나를 극복하고 또 다른 나로 변신하는 과정이다. 

"사내여, 여인이 사랑을 할 때 여인을 두려워하라. 여인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기 때문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그에게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사내여, 여인이 미워할 때 여인을 두려워하라. 사내는 그 영혼의 바탕에서 사악할 뿐이지만 여인은 바로 그 바탕에서 열악하기 때문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 110).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받쳐야 한다. 왜냐하면 그 밖의 모든 것은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 삶을 사랑할 때 내가 정말 사랑하고 싶은 나와 내 삶이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 자신도 백 개나 되는 영혼을 가로질러 자신의 길을 걸어왔으며 백 개나 되는 요람과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나의 길을 걸어왔다고 고백하고 있다. 삶이란 하나의 요람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정해진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요람과 다른 요람에서 새로운 나를 임신하고 어제와 다른 나를 낳기 위한 해산의 고통을 경험하는 끝이 없는 자기 변신의 과정이다.
"깨침에 있어 나는 내 의지가 갖고 있는 생식-욕구와 생성-욕구만을 느낀다. 그리고 만약 나의 깨침에 순진무구란 것이 깃들어 있다면, 그것은 생식에 대한 의지가 그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리라"(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143). 생명은 그 자신이 겪는 고통을 통하여 자신의 앎을 증대시킨다. 앎은 그래서 상처다. 고정된 틀을 깨뜨리지 않으면 ‘깨달음’은 오지 않는다. 즉 ‘깨달음’이 오려면 고정관념에 시비를 걸고 통념을 깨뜨리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 깨뜨리면 아프다. 아프지 않고서는 새살이 돚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을 깨트리는 산고를 겪어야 내가 다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고난은 고통을 준다. 피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나면, 쉽게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한다. 고난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다른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고, 다른 것을 다르게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린다. 고난은 기존의 생각을 깨뜨리고, 바라보는 관점을 깨뜨리며, 느끼는 감각과 듣는 청각을 깨뜨린다. 새로움과 낯설음에 익숨함과 편안함이 깨어질 때 '깨달음'이 온다.  

‘깨우침’은 잠자고 생각을 흔들어 깨우는 일, 즉 ‘깨어남’이고, ‘깨달음’은 기존의 생각이 깨지는 아픔을 겪은 후에 불현 듯 찾아오는 새로운 눈, 즉 ‘깸’이다. ‘깨우침’은 잠자고 있는 생각을 흔들어 깨워야 일어나고, ‘깨달음’은 고정된 사고방식과 통념을 사정없이 깨 부숴야 온다. 이런 점에서 ‘깨우치다’는 ‘깨달아 알게 하다’라는 뜻이고, ‘깨달음’은 생각하고 궁리하여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은 곡선의 방황과 시행착오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저절로 깨닫는 경우는 없다. 오로지 고난에 직면하면서 고통을 체험한 연후에 깊은 생각의 와중에서 ‘깨달음’은 안에서 밖으로 순식간에 나온다. 스스로 깨뜨려야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깊은 ‘깨달음’이 온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스스로 깨달으려면 생각의 틀을 깨뜨려야 한다. 생각의 틀을 깨뜨리는 유일한 방법은 이전과는 다른 자극과 다른 방법으로 잠자고 생각에 충격을 주어야 한다. 내 생각이 망치로 깨질 때 우리는 비로소 생각하게 되며, 생각하는 일이 발생한다. 니체는 철학을 ‘망치질’에 비유했다. 틀에 박힌 통념과 상식의 벽안에 안주하는 생각을 망치로 깨부술 때 비로소 깨우칠 수 있고 '깨달음'의 출발선에 설 수 있다. 깨달음의 출발선에서 내가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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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에서 교육공학으로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Florida State University에서 Instructional Systems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삼성인력개발원에서 즐거운 학습과 건강한 지식을 창조하여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을 5년간 경험한 후 현장에 현실이 있고 현실 속에 진실과 진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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