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치를 들어라! 

“아, 너희, 사람들이여. 돌 속에 하나의 형상이, 내 머리 속에 있는 많은 형상 가운데 으뜸가는 형상이 잠자고 있구나! 아, 그 형상이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하고 보기 흉한 돌 속에 갇혀 잠이나 자야 하다니! 이제 나의 망치는 저 형상을 가두어두고 있는 감옥을 잔인하게 때려부순다. 돌에서 파편이 흩날리고 있다. 무슨 상관인가?"(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 143).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체념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사람은 변화를 꾀할 수 없다.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니체 철학의 핵심은 기존 가치의 전복과 새로운 가치 창조에 있다. 기존 가치를 전복하는 위험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모험의 양면성이 니체철학의 본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니체는 그릇된 허위의 확실성을 망치로 부숴버리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는 파괴와 전복의 철학자로 각인되는 이유다. 니체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공격적 어휘와 폭력적 행위를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다. 니체가 사뭇 난해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서슬 퍼런 칼날 같은 언어로 일관되게 밝히고 싶었던 의도는 우리가 보려 하지 않는 ‘숨겨진 근저’의 발굴과 폭로다(이진우, 2009). 니체에게 있어서 발굴과 폭로는 파괴와 해체보다는 창조와 생성에 목적이 있다. 니체는 창조와 생성을 위해 언제나 망치를 들고 다닌다. 니체가 들고 다니는 망치는 난공불락이라고 믿었던 우상을 부숴버리는데 사용하지만 부숴버린 우상 뒤에 새로운 가치체계를 건설한다. 그렇게 창조된 삶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이다. 아름다운 삶은 삶의 열병을 심하게 앓고 나서 비로소 탄생하는 삶이다. ‘아름다움’은 앓고 난 사람의 사람다움, ‘앓음다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니체는 말한다. "창조하는 자 자신이 태어날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산모가 되어야 하며 해산의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 142). 해산의 고통 없이 어린 아이가 탄생하지 않듯이 깨지는 고통 없이 새로운 가치는 창조되지 않는다. 

니체에 따르면 새로운 창조자가 되려는 자는 누구나 일체의 가치를 그 뿌리로부터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파괴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창조하기 위해서 니체는 자신이 들고 있는 망치를 파괴의 도구가 아니라 창조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 ‘옳다’고 믿는 신념체계나 진리를 사정없이 부숴버린다. 고대로부터 믿어온 절대적 진리와 인간이면 누구나 믿고 따라야 되는 도덕에 대해서도 망치를 휘두른다. 니체는 묻는다. 도대체 만고불변하는 절대 진리가 어디에 있으며, 누가 만들었는가? 시공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보편타당한 도덕이라는 것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인가? 니체에 다르면 만고불변의 절대 진리, 어떤 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 진리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가치들은 정확히 검토되지 않은 유해한 신념 위에 세워진 것들이다. 정신적인 원칙들을 아무런 근거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사람들은 ‘믿음’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아무런 근거 없이, 아니 근거는 있지만 시대착오적 가정위에서 싹튼 무비판적 신념과 가정위에 세워진 원칙들이 많다. 원칙은 어떤 근거로 만들어진 원칙인지, 누구의 의지가 반영된 원칙인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 원칙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고 있으며, 누구를 위한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니체는 시대착오적 관습과 원칙에 근거 없이 집착하는 태도를 약한 자들이 자신의 신념을 보호하기 위한 위선적 행동일 뿐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환상에 대한 환멸을 느껴야 새로운 상상이 시작된다. 시대착오적 관습과 원칙, 잘 못된 신념과 가정 위에 세워진 절대 진리와 도덕에 대한 환상을 깨부수는 방법은 환상의 대상에 대한 환멸이다. 그 환멸의 시작이 바로 ‘망치질’이다. 니체는 이제까지 서양철학의 중심에 서 있던 신 중심의 철학을 망치로 부수고 인간중심의 철학을 복권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서양철학의 근간인 형이상학 중심의 철학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점을 천명한 것이다. 형이상학이 만들어낸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거짓 환상을 심어준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보라고 외친다. 거짓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니체가 저지른 시대적 사건이 바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영원불변하는 형이상적 진리의 건물에 들어 앉아 살아가는 온갖 형태의 우상을 망치질로 무너뜨린 역사적 사건이다. 니체가 선언한 ‘신은 죽었다’에서 ‘신’은 최고의 가치나 절대 진리다. 따라서 신의 죽음은 만물을 존재케 해주는 어떤 초월적 실체의 사라짐이자, 선악(善惡)과 미추(美醜)를 판단케 해주는 절대적 가치 기준의 붕괴를 의미한다(고병권, 2008). 신의 죽음은 “연속적인 붕괴, 파멸, 멸망, 전복”을 뜻하며 모든 가치들의 전복을 뜻한다. 전통이 전복된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전통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신의 죽음은 곧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의 탄생을 의미한다. 위버멘쉬는 파괴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새로운 삶을 조각하고 싶은 자는 낡은 삶을 지워내야 하듯이 창의적 성과를 창출하고 싶은 사람은 틀에 박힌 통념과 시대착오적 관행 및 관습을 폐기처분해야 한다. 과거를 ‘부정’해야 새로운 미래를 ‘긍정’할 수 있으며, 전통을 파괴하는 진통이 있어야 새로운 전통이 재정립될 수 있다. 그러나 파괴가 ‘파괴를 위한 파괴’에 머무르고 새로운 창조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창조적 파괴가 아니라 전복적 파괴나 범법적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파괴가 의미와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새로운 창조로 이어지는 노력이 부단히 뒤따라야 한다. 새로운 창조는 낯선 세계와의 마주침을 통해서 일어난다. 익숙한 여기의 세계에서 낯선 저기의 세계로 떠남을 통해서만이 창조의 신천지와 만날 수 있다. 익숙한 과거로부터 과감하게 탈주, 낯선 미지의 세계로 탐험을 떠나기 위해서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무사안일의 끈을 과감하게 끊어야 한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무더운 사막을 묵묵히 건너는 낙타에서 현실적 벽에 항거하고 자유로움을 부르짖는 사자로 재탄생해야 한다. 울부짖는 사자는 용맹성만으로 뿌리 깊게 박힌 조직적 악습과 관행의 덫을 걷어내기 어렵다. 다가오는 예측불허의 도전에 대비하려면 호기심과 열린 마음으로 미지의 세계를 무한한 가능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어린 아이의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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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에서 교육공학으로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Florida State University에서 Instructional Systems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삼성인력개발원에서 즐거운 학습과 건강한 지식을 창조하여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을 5년간 경험한 후 현장에 현실이 있고 현실 속에 진실과 진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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