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애무하라! 

“태양은 순박하고 창조의 열망에 불타고 있는 것들을 온몸으로 사랑한다. 저기를 봐라. 저리도 서둘러 바다가 태양을 향해 솟구치고 있지 않는가! 너희들은 그 사랑의 갈증과 뜨거운 입김을 느끼지 못하는가? 바다가 천 개나 되는 젖가슴으로 태양을 향해 솟아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뭔가 일이 풀리지 않으면 자신의 운명을 탓하는 사람이 많다. 뭔가 일이 잘 풀려도 나는 잘 될 수 있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한다. 일이 잘 안 되면 운명 때문이고 일이 잘 풀리면 운명 덕분이라고 한다. 운명은 이렇게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칭찬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사람은 운명을 등지고 태어났지만 그 운명 때문에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없다. 사느냐 마느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태어났으면 살아가야 한다. 운명을 무조건 수긍하고 수동적으로 살아가서도 안 되고 운명을 거부하고 자기 파괴적 행동으로 살아가서도 된다. 타고난 운명이야 어떻든 자신이 새로운 운명을 창조하면 된다.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창조하라는 메시지를 준다. 운명을 어떻게 등지고 태어났든 우리들의 삶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그 작품을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는 바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 우선 삶을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한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운명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우선 창조의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타고난 운명이라고 해도 내가 어떤 운명으로 재창조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이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운명을 재창조하고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부터 사랑해야 한다. 

제리 워터스는 이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자기 자신과 결혼할 수 있는가?
자신이 아름답고 매력적이라고 믿고 있는가?
자신의 재능을 가치 있게 생각하는가?
자기 자신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람 있고 만족스러운 일이라고 여기는가?
당신 스스로 자신의 진가를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당신을 높이 평가하는가?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서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기를 기대하는가? 나는 세상의 그 어떤 사람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유일함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당연히 나는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내가 창조해가는 내 삶도 사랑할 수 없다. “당신의 존재는 우연이 아니다. 당신은 대량 생산되지 않았고, 일괄 조립된 상품도 아니다. 당신은 창조주에 의해 신중하게 계획되었고, 특별한 재능을 받았으며, 사랑을 받으며 세상에 나왔다.” 작가 막스 루카도(Max Lucado)의 말이다. 지상 최고 최상의 의무는 자신의 재능과 가능성을 찾아 빛나게 하는 것이다. 자신만의 독특함을 빛내는 일이야말로 세상을 밝히는 일이다. 세상을 빛나게 하려면 우선 자신을 사랑해야 되는 이유다. 나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내가 어떤 운명을 타고 태어났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창조하고 싶은 운명을 재창조하면 되기 때문이다. 니체는 말한다. “너희들의 연구가 태양의 정사를 닮아야 한다. 사물에게 다가서고 싶다면 먼저 그것을 애무해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것을 알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안에는 나만의 유일함과 독특함, 그리고 남과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재능과 강점이 살아 숨쉬고 있다. 나를 사랑하면 내 안의 모든 가능성의 문이 활짝 열린다. 그 가능성의 문으로 들어가느냐 마느냐의 여부도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내안의 가능성을 찾아 부단히 실험해보고 탐색해보며 시도하고 도전하는 사람, 그것이야말로 내 운명을 사랑하는 삶이다. 

새롭게 태어나고 싶으면 운명조차 사랑해야 한다!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삶을 관심과 애정으로 애무해주어야 한다. 내가 살아가는 삶을 알지 못하고 내 삶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아야 사랑할 수 있다. 사랑하고 싶은 대상과 사람을 알지 못하면 안을 수 없다. 알아야 안을 수 있다. 안다는 것은 앎의 대상이 갖고 있는 존재의 아픔을 안다는 것이다. 아픔을 알아야 아픈 상대를 안아줄 수 있다. 니체는 삶을 사랑한다면 그것과 친구가 되라고 주장한다. 삶을 사랑함은 그것에 구속되는 것도 그것을 구속하는 것도 아니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처럼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창조한다(고병권, 2007). 니체는 삶에 대한 사랑을 ‘운명애’(amor fati)라고 부른다. 참된 사랑은 운명을 거부하는 것도 운명에 구속되는 것도 아니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운명을 아름답게 창조해주는 것이다(고병권, 2007). 창조에는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저절로 창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구나 사랑하는 대상을 창조하는 행위는 엄청난 위험과 아픔이 따른다. 니체에 따르면 창조하는 자가 스스로 다시 태어날 어린 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산모가 되어야 하고 산고를 마다하지 않아야 된다고 했다. 산고 끝에 한 생명이 탄생하듯이 고통 속에서 창조의 꽃이 핀다. 정말 사랑하면 상처받을 수 있다. 가슴에 멍이 들 수도 있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흉터가 되고, 흉터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 사랑하는 대상이 마음대로 창조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삶을 창조하는 여정은 위기의 연속일 수 있다. 위기가 동반되지 않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정말 사랑하면 심각한 위기를 경험할 수 있다. 대강 좋아하는 삶은 삶이 싫어지면 쉽게 사랑의 끈을 놓아버리면 된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의 위기와 고난까지도 사랑한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삶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불만족스러운 삶을 포기하는 아픔까지도 감수해야 한다. 불만족스러운 삶을 포기하는 아픔 없이 저절로 사랑하는 삶이 창조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삶을 창조하기 위해서 니체는 자신이 들고 있는 망치를 파괴의 도구가 아니라 창조의 도구로 사용한다. 우리를 구속하는 일체의 우상을 파괴하고, 온갖 헛된 망상의 벽을 허물어 버리며,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 운명까지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그렇게 창조된 삶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이다. 아름다운 삶은 삶의 열병을 심하게 앓고 나서 비로소 탄생하는 삶이다. ‘아름다움’은 앓고 난 사람의 사람다움, ‘앓음다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신을 뛰어 넘어 그들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다.” 운명을 재창조하는 과정은 내 삶을 지배해왔던 이전의 삶에서 내가 사랑하는 다음 삶을 개척하는 과정이다. 운명의 재창조는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해온 운명에서 내가 스스로 창조하는 운명으로의 변신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기극복’을 통해서 ‘자기창조’를 이룩해낸 것이다(고병권, 2007). 운명에 구속되지도 않고 운명에 순응하지도 않는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운명을 거슬러 올라가는 창조의 ‘여정’에는 ‘열정’과 용기가 요구된다. 용기 없이 두려움에 맞설 수 없고 ‘열정’ 없이 ‘여정’을 마칠 수 없다. ‘열정’ 없이 운명을 재창조하는 ‘여정’을 떠나지 말아야 된다. ‘열정’이 자신이 사랑하는 운명을 재창조하는 ‘여정’의 연료라면, 용기는 내가 사랑하는 운명의 앞길을 밝히는 등불이다. 열정은 환상적이고 화려하고 멋있어 보이지만 그것은 열정이 발휘되어 나타난 표면적 결과일 뿐이다! 열정의 이면에는 고뇌의 흔적과 치열한 전투가 가려져 있다. 운명을 재창조하는 여정에서 오르기 힘든 언덕을 만날 수 있고 헤쳐 나오기 어려운 진흙 구렁텅이에 빠질 수도 있다. 걷기 평탄한 길만 있는 게 아니다. 먼 곳을 항해하는 배가 풍파를 만나지 않고 조용히만 갈 수는 없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차라리 고난 속에 인생의 기쁨이 있다. 풍파 없는 항해, 얼마나 단조로운가! 고난이 심할수록 내 가슴은 뛴다고 니체는 외치고 있다. 등산의 기쁨은 정상에 올랐을 때 가장 크다. 그러나 나의 최상의 기쁨은 험악한 산을 기어 올라가는 순간에 있다고 니체는 설파하고 있다. 길이 험하면 험할수록 가슴이 뛴다. 인생에 있어서 모든 고난이 자취를 감췄을 때를 생각해 보라! 그 이상 삭막한 것이 없으리라고 계속해서 무사태평한 삶을 살아가는 최후의 인간들에게 니체는 최후의 통첩을 날린다. 운명아! 비켜라. 용기 있게 내가 간다. 니체는 이런 점에서 용기를 삶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하고 있다.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지 않고 아름다운 운명을 재창조하면서 스스로 감탄하는 차라투스트라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의 ‘극단에까지 가고 싶다’를 애송하면서 기꺼이 극단까지 가본다. 스스로를 한계 상황으로 몰고 간다.  
모든 일에서
극단에까지 가고 싶다.
일에서나, 길을 찾거나,
마음의 혼란에서나. 

살같이 지나가는 나날의 핵심에까지
그것들의 원인과
근원과 뿌리,
본질에까지.

운명과 우연의 끈을 항상 잡고서
살고,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발견하고 싶다. 

아, 만약 조금이라도
내게 그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여덟 줄의 시를 쓰겠네.
정열의 본질에 대해서. 

오만과 원죄에 대해서.
도주나 박해
사업상의 우연과
척골(尺骨)과 손에 대해서도. 

그것들의 법칙을 나는 찾아내겠네.
그 본질과
이니셜을
나는 다시금 반복하겠네.

출처: 욕망하는 지식생태학자 블로그 http://kecologist.blog.me/70118867739
트위터: http://twtkr.olleh.com/kecologist
페이스북: http://www.facebook.com/kecologist

한양대학교에서 교육공학으로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Florida State University에서 Instructional Systems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삼성인력개발원에서 즐거운 학습과 건강한 지식을 창조하여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을 5년간 경험한 후 현장에 현실이 있고 현실 속에 진실과 진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