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앓음다움’입니다!

입력 2011-07-02 20:44 수정 2011-07-02 20:44


‘아름다움’은 ‘앓음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은 ‘앓음다움’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아름다움이란 상처가 피워낸 꽃입니다. 천영희 시인의 말입니다. 상처를 알고 슬픔을 삭인 사람만이 아름다움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앓고 난 뒤에 사람이 보여주는 ‘사람다움’입니다. 앓는 동안 아픔의 상처가 흔적이 되고 그 흔적은 시간과 더불어 아름다운 추억이 됩니다. 살아오면서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모두가 이런 저런 사정으로 여러 가지 아픔을 견디고 살아갑니다. 그 아픔의 넓이와 깊이, 종류와 성격은 모두 다르지만 그 아픔이 아름다움을 만들어간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입니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압니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픔이 주는 고통을 감싸 안아줄 수 있습니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앎은 아픔의 공감에서 비롯됩니다. 내가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겪은 또는 겪고 있는 아픔을 공감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진주조개의 영롱함과 아름다움은 진주조개 속살에 생긴 상처를 메워가면서 탄생된다고 합니다. 진주의 아름다움은 진주조개가 견뎌낸 자신의 상처 덕분입니다. 상처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라 상처 덕분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상처의 골이 깊을수록 앓음이 강도가 커지며 그럴수록 앎은 더욱 깊어집니다.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생기는 상처의 골이 깊을수록 더 큰 흉터가 생기지만, 흉터위에 피는 깨달음이 깊이도 같이 깊어집니다. 외부의 심각한 비판과 질책에 만신창이가 되는 앎일수록 더욱 확고부동한 앎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내 앎의 한계가 내 앎의 상처가 되지만, 그런 상처를 견뎌낸 앎이야말로 다른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따뜻한 앎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앎은 그래서 언제나 세상을 향해 외치는 따뜻한 관심이자 배려입니다. 앎은 허공에 대고 외치는 공허한 메아리가 아닙니다. 타인의 아픔에 눈감는 앎은 앎이 아닙니다. 진정한 앎은 언제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간의 관계를 보듬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따뜻한 인간적 배려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눈에 돋보이는 사람, 그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시련과 역경을 극복해서입니다. 아름다운 ‘경력’은 ‘역경’을 뒤집은 사람이 보여주는 인생 역사입니다. 남다른 경력에는 우여곡절과 시행착오의 흔적이 숨어 있습니다. 그런 흔적이 아름다운 경력의 무늬로 빛을 발합니다. 강수진의 발레가 아름다운 것은 발로 보여준 수고와 정성 덕분입니다. '발'은 아름답지 않지만 '발레'는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는 수고와 정성, 아픔과 슬픔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노력이 보이는 아름다움을 만들어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래서 내면의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진통’ 끝에 탄생하는 ‘전통’입니다. 아픈 ‘진통’이 아름다운 ‘전통’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는 ‘진통’이 흔들리지 않는 ‘전통’을 새우는 원동력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확고부동한 ‘전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통’도 또 다른 ‘진통’으로 무너지고 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는 진통이 전통에 심한 생채기를 냅니다. 전통에 생긴 심한 생채기는 아픈 상처지만 그 상처를 보듬는 또 다른 앎이 있기에 영광의 흔적이고 아름다운 무늬가 됩니다. 

정호승 시인은 상처가 스승이라고 합니다. 상처로부터 배우는 사람이 아픔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앎은 상처입니다. 앎은 기존의 앎에 심한 생채기를 내는 과정에서 생깁니다. 모르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을 때 기존의 앎에 깊은 상처가 생깁니다. 그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지는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기도 합니다. 알고 있었지만 잘 못 알고 있었다는 통한의 눈물이 나를 아프게 하지만 그런 아픔 뒤에 더 깊고 넓은 앎이 생깁니다. 기존의 앎에 생채기를 크게 낼수록 앎은 의미심장해집니다. 상처는 그래서 언제나 스승입니다. 앎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앎은 더 이상 앎이 아닙니다. 앎은 언제나 지금 여기의 세계에서 다음 저기의 세계로 끊임없이 탐구해나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분투노력하는 놀라운 깨달음이자 깨우침입니다. 그 깨달음과 깨우침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조금 전의 깨달음과 깨우침으로 생긴 앎은 또 다른 앎을 향한 일로매진하는 동사입니다. 그래서 앎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옳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일정 시점에서 일정시간만 진리로 통용되는 일리 있는 진리일 뿐입니다.  

새로운 앎을 축적해나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앎에 머무르지 말고 새로운 앎을 향해 언제나 매진해야 됩니다. 앎을 향한 행보에 더욱 불이 붙기 위해서는 기존의 앎에 대한 불만이 커야 됩니다. 그런 불만은 기존의 앎에 불안감을 줄 수 있습니다. 불만과 불안으로 생긴 지적 불균형이 심할수록 앎을 향한 행보에는 뜨거운 불길이 솟기 시작합니다. 또 다른 앎의 결과로 기존의 불안한 앎과 불편한 앎을 완화시켜 주거나 해소시켜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앎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앎을 불안하고 불편하게 만들어주는 지적 자극이 필요합니다. 지적 자극은 기존의 앎에 상처를 만들 수 있지만, 상처를 아물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또 다른 앎으로 그 상처를 어루만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앎은 그래서 상처투성이의 흉터로 얼룩져 있습니다. 앎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픈 게 아니라 앎 자체가 아픕니다. 아픈 앎일수록 더 아픈 앎을 추구합니다. 그런 앎이라야 아픈 사람도 감싸안아줄 수 있는 깊은 애정과 따뜻한 관심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한양대학교에서 교육공학으로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Florida State University에서 Instructional Systems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삼성인력개발원에서 즐거운 학습과 건강한 지식을 창조하여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을 5년간 경험한 후 현장에 현실이 있고 현실 속에 진실과 진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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