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지금 이 시각,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만주 하얼빈역에서 6발의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민족의 숨결이 아주 끊어지지 않았음을 전 세계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알리는 순간이었다. 같은 총알이라도 검은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쏜다면 불의의 흉탄이 되지만 악을 제거하는 데 쓴다면 「정의의 심판」이 된다. 당시 서른 살의 안중근 의사(安重根 義士)는 총알 6발 중 3발을 왜적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과 배에 명중시킨 다음 나머지 3발로 그의 부하 3명을 쓰러뜨렸다. 쾌거를 이룩한 즉시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장쾌하게 외쳤다.

  그 이토는 갑신정변 쿠데타, 그리고 명성황후가 무참히 시해된 을미사변을 배후에서 조종한 난폭자다. 이토는 궁중에 침입하여 고종황제를 총칼로 위협하고, 외부대신의 도장을 탈취하여 강제로 을사늑약을 맺었다. 다큐멘타리 「동물의 세계」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물소를 하이에나가 뜯어 먹는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이토가 병든 조선을 제멋대로 짓밟는 모습을 떠 올리게 된다. 저항하지 못하는 약자를 유린하는 극악한 범죄 중에서도 중세의 마녀사냥, 나찌의 홀로코스트 그리고 일제의 정신대는 인류 역사상 3대 죄악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셈인지 해방 70년이 되어가도 우리 정부에서는 정신대에 대한 진상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냥 울부짖는다고 어찌 노예상태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만세 한번 부르고 낙엽처럼 스러져 가는 것은 그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냐?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면 이 또한 씻지 못 할 죄악이다. 무력투쟁 이외에는 구국의 길이 없다고 판단한 1909년 1월 12명의 동지들과 함께 조국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새끼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맺었다. 이는 안의사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항심(恒心)을 다시 다짐하는 의미가 있었다. 백범선생도“한 때는 불타는 애국심을 토로하다가도 어느 결에 변절하여 앞잡이가 된 자들을 무항배(無恒輩)라”고 부르며 경계하라고 하였다.
  안의사의 의거는 이토를 황천으로 보냈다는 사실보다 당시 갈 길을 잃고 지쳐 나자빠진 조선인들의 혼을 꿈틀거리게 하고 경종을 울렸다는데 큰 의의가 있었다.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사회가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 깨인 사람들이 어떻게 처신하여야 하는 가를 행동으로 보여 준 것이다.
  그러나 그런 희생은 극한상황에 처했을 때 일어나는 일이어야 한다. 자주 반복된다면 그 사회가 위기의 연속 상태에 빠져있음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위기를 맞기에 앞서 먼 생각을 가져야만 희생자가 생기지 않는다. 횃불은 어두워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이지 사방이 대낮같이 밝을 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여순 옥중에서 쓰고 大韓國人 安重根 서명과 함께 무명지가 잘려진 왼손으로 도장을 찍은 “人無遠廬 必有近憂(論語, 衛靈公 ; 사람이 먼 생각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닥친다)”는 휘호는 “또 다시 나라를 빼앗기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고 후세의 한국인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벼슬아치들이 백성들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권력투쟁과 일신의 영화(?)만 도모하다가 산과 들을 빼앗기고 이름도 빼앗기고 심지어 넋까지 빼앗긴 까닭은 한마디로 「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광기를 부리다가 역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을 맞고 애꿎은 목숨을 수없이 희생시킨 일본 군국주의도 모두 먼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먼 생각은 과거와 오늘을 성찰하는데서 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뛰자면서 그냥 달리다 돌아보면 다시 제자리에서 맴돌게 되기 때문이다.   
증권감독원에서 증권제도연구실장, 조사부장, 조사연구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미시간 주립대 객원연구원, 이코노미스트, iweekly 편집위원을 역임하였으며 성도회계법인 부회장, 현재 선인장학재단 이사,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인, 비즈니스 워치 금융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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