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술매장에서 포도주 달라고 하면 십중팔구는 "아, 와인이요?"라고 반문합니다. 그런데, 이 반문이 상당히 비논리적입니다. 와인은 과실주 일반을 나타내는 명사이고, 포도주는 과실주 중에서도 포도로 빚은 술을 나타내는 명사입니다. 구체적인 명사를 제시했는데, 보다 넓은 범위의 명사로 반문한 꼴입니다. 자동차 대리점에서 "SUV 보여주세요" 했더니 "아, 자동차요?"라고 한 셈입니다.

하지만 포도주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굳이 와인을 고집합니다. 어처구니 없이 비논리적이지만,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의 기억은 기억의 대상 하나만 저장돼 있는게 아니라, 연합망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요소가 활성화하면, 그와 연관된 다른 요소도 함께 작동합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의 기억은 조작가능합니다.

오른쪽 그림은 만화 캐릭터인 버니입니다. 그런데, 디즈니랜드에서 버니 캐릭터와 악수를 한 적이 있냐는 질문에 어떻게 답할까요? 대부분 아니오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버니는 디즈니의 경쟁사인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캐릭터이기 때문입니다. 디즈니랜드에 경쟁사 캐릭터가 있을리 없지요. 에버랜드에서 LG전자의 제품을 봤냐고 물어보는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디즈니랜드에서 버니와 악수를 한적이 있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실험 일주일 전에 디즈니랜드를 배경으로 버니가 등장한 광고를 보았을 때 입니다. 디즈니랜드의 오락적 요소와 버니의 오락적 요소가 동일하다 보니, 둘의 기억은 긴밀하게 엮여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기억이 활성화하면, 다른 기억도 함께 활성화할 개연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이를 와인과 포도주의 사례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와인"이란 명사에는 "과실로 빚은 술"이란 기억뿐 아니라, 세련됨, 고급스러움, 서구적, 뭐 이런 내용들이 연결돼 있습니다. 반면, "포도주"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 옛날 달짝지근한 진로포도주가 생각나나... 포도주란 명사에는 촌스러움이 연결돼 있는듯합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외국어에는 "세련됨, 고급스러움"이 연결돼 있고, 한국어에는 그렇지 못하니 말입니다. 60,70년대라면 이해갑니다. 우리는 미국을 배우고 따라하는 처지였으니까요. 하지만, 21세기에도 그런 현상이 남아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오히려 그 정도가 심해지는 느낌입니다. 영화제목을 보면, 아예 영어를 발음 그대로 옮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심지어 문장까지. 가장 뒤집어지게 하는 사례가 "인 어 베러 월드"입니다. In a better world를 발음 그대로 쓴답시고 better를 "베러"로 표기한 것이지요.

(사족: 영화포스터에는 "베러"를 굵게 강조하기까지 했습니다. better는 강세가 앞에 있고, 뒤에 약세가 있습니다. 한글자 한글자에 비슷한 강세를 주는 한국어로는 강세와 약세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영어를 어떤 식으로 해도 정확하게 표기할 수 없습니다. 베터나 베러나 다 똑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한 규칙대로 표기하면 그만입니다.)

미국 따라하기가 성공적이기만 하지만, 언제까지나 따라하기가 먹힐수는 없습니다. 이제 스스로 서야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가짐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말을 써야하는게 단지 국수적인 애국심의 발로만은 아닙니다. 언제까지 2등국가로 남을건가요?

이젠 포도주 한잔합시다.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경제신문에서 기자로 사회에 첫 발을 디뎠습니다. 미국 University of Alabama에서 박사 학위(커뮤니케이션 전공)를 받았습니다. 박사 논문 주제는 슬픔과 즐거움의 심리입니다. 주 연구 분야는 미디어 사용이 인지역량, 정신건강 및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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