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내 마음의 그대 '가야산 소리길'


▲ 가야산 소리길 들머리에서 <사진: 윤영 수필가>

닫혀진 창문엔 아침바람이 다녀갔겠다
두고 온 운동화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겠다
마른 수돗가엔 쌓이는 먼지만큼
운동화끈이 고요히 바래가겠다
장독에는 티끌도 소복하겠다
서리 맞은 소국은 눈 못 뜨고
머리 숙이고 있겠다
감잎은 밤마다 혼자 지겠다
그 소리 빈집 구석구석
마른 입술같이 쌓여가겠다
저녁은 대문만 만지다 그냥가겠다

– 이태선 ‘빈집으로 보내는 가을편지’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줄’ 편지를 쓴 적이 언제였던가. 이제는 눈 먼 바람이 불어와도 코를 큼큼거리며 가렵다고 겨드랑이만 긁을 뿐입니다. 호출이 있으면 언제든 달려나가 얼굴 부비던 ‘그대’의 부재. 만사가 시큰둥한데요. 이태선 시인에게는 아무도 없는 ‘빈 집’이 ‘그대’입니다. 아침 바람이 다녀가고, 수돗가엔 먼지가 쌓이고, 운동화 끈이 바래가고, 소국이 머리 숙이고 있고, 감잎은 혼자 지고, 그 소리가 마른 입술처럼 쌓이는 빈 집에는 시간의 여백이 숨 쉬고 있습니다. 저녁이 대문만 만지다 그냥 돌아선 시인의 빈 집 문턱을 염치 불구하고 넘습니다. 여백 한 켠에 살짝 앉아 주위를 둘러봅니다. 들판이 열리고 강물이 흐르고 산맥이 병풍을 둘러칩니다. 만추의 ‘그대’가 거기 서 있었네요.

가야산 소리길.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축전 주차장에서부터 해인사에 이르는 6.3km의 홍류동(紅流洞) 계곡을 끼고 있는 길입니다. 물, 새, 바람 소리에다 세월이 흐르는 소리까지 들린다고 하지요. 들머리 돌 표지판에서 사진 한 장 찍고 ‘덩쿨 터널’을 지나면 가을 추수가 끝난 논밭과 다수의 민가가 나그네를 맞이합니다. 확 트인 시야가 세간의 트래픽에 찌든 가슴을 뻥 뚫어줍니다.

오른쪽 계곡따라 이어지는 흙길과 구름다리를 지나면 본격적인 소리길이 시작됩니다. 가파르지 않은 조붓한 오솔길과 자연스런 나무 데크를 여유롭게 걷다가 고개를 들면 저 멀리 정상의 암봉들이 병풍처럼 펼쳐진 장관이 눈에 들어옵니다. 영험한 기운이 결코 예사롭지 않은 산인데요. 하긴 신라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이 만년에 이곳에 숨어 살다가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생전의 성철 스님이 주석한 고찰 해인사가 자리잡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바위 더미를 미친 듯 달려 첩첩의 산봉우리 울리니/ 사람들의 말 소리를 지척 간에도 분별하기 어렵네/ 항상 세상의 시비 소리가 귀에 들릴까 두려워/ 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막았네.(최치원 ‘농산시 籠山詩’)

한 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닿고 수미산을 덮었다. 산 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지니 그 한이 만 갈래나 되고 한 바퀴 붉은 해는 푸른 산에 걸렸도다.(성철 스님 ‘열반송’)

경북 고령에서 합류한 아리따운 문우들과 함께 이 길을 걸었습니다. 그저 ‘문학’이라는 끈 하나만으로 이어졌지만 한 시간도 안 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끈을 발견할 수 있었지요. 달달한 막걸리에 불콰해진 마음들이 각자의 풍경화를 진솔하게 그려냈던 시간들. 카메라 셔터는 서먹하고 건조한 풍광을 입력했으나 화면에는 따스하고 친근한 인간이 출력돼 있었습니다. 내년 봄꽃이 필 때까지 그대 소리길 “안녕!”


▲ 가야산 소리길

 

마산에서 태어나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했습니다. 주부생활ㆍ일요신문을 거쳐 한국경제신문에 입사,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으로 일했고요.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경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