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예쁘게 찍지 않고 아프게 찍은 '서편제'

“사람이 살면은 몇 백 년 사나 개똥 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
소리 따라 흐르는 떠돌이 인생 첩첩이 쌓인 한을 풀어나 보세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 내 가슴 속엔 수심도 많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흠흠흠 아라리가 났네”

화면 상단에 나타난 세 사람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덩실덩실 들판을 넘어옵니다. 돌담을 끼고 내려오는 황톳길. 카메라는 정확히 5분 10초 동안 움직이지 않고 이들을 맞이합니다. 영화 ‘서편제’에서 많은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장면인데요. 청산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정서와 한을 토해내는 이 장면 속에는 메가폰을 잡은 임권택 감독의 몇 가지 영화적 실험이 숨어 있습니다.

우선 ‘소리의 원근법’을 무시했다는 점입니다. 보통은 먼 곳에서 약하게 시작돼 가까워질수록 고조되는데 반해 이 장면에서 들려주는 ‘진도 아리랑’ 노랫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크기가 같습니다. ‘소리를 자르지 않으려는’ 감독의 미학이 개입된 결과지요. 다음으로는 인물들의 움직임을 눈여겨 볼 수 있습니다. 멀리서는 느리게 이동하다가 카메라에 접근하면서 동작이 빨라집니다. 이는 5분이 넘는 롱 테이크(Long take, 장시간 촬영)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지루함을 덜어준다는 계산이 깔려 있지요.

“서편제의 촬영 장면은 하늘이 도와주는 것만 같았다. 배경이 너무 밋밋하다고 생각하면 느닷없이 돌개 바람이 불어 화면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대나무 숲을 찍을 때에는 약한 바람이 불어줘 버석버석 소리가 났다. 날씨가 흐려지기를 기다리면 쨍쨍하던 해도 구름 뒤로 숨었다. 누군가 ‘한 맺힌 판소리 광대 귀신이 돕는 것 같았다.”(정일성 촬영 감독)

임권택의 92번째 영화인 서편제는 월간 종합 잡지인 ‘뿌리 깊은 나무’에 발표됐던 이청준의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됐습니다. 제작자인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는 당시 ‘작품성 있는 영화를 만들어 해외 영화제에나 내보내자’는 생각으로 손을 댔다고 합니다. 흥행보다는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만 얻으면 만족’이라는 소박한 기대를 가졌던 것이지요. 그러나 막상 영화가 막을 올리자 예상하지 않았던 관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그것은 곧 신드롬이 됩니다. 1993년 4월 10일 단성사 단관 개봉해 그해 10월 100만 명 돌파라는 이정표를 세웁니다. 단성사는 77년 ‘겨울 여자’, 90년 ‘장군의 아들’ 그리고 ‘서편제’를 통해 한국 영화의 흥행 역사를 고쳐쓰는 대박 상영관이 됩니다. 
   

▲ ‘한이 서려야 득음한다’는 아버지에 의해 장님이 된 송화.


▲ 송화가 눈 덮인 산을 마주하고 소리를 하는 모습.
여기서 겨울 산은 앞이 보이지 않는 송화 ‘마음의 풍경’. 


▲ 영화 마지막 부분, 동호를 만난 직후 다시 길을 떠나는 송화.

소리를 위해 수양 딸의 눈을 멀게 하는 비정한 아버지 유봉 역의 김명곤, 그런 아버지를 용서하고 자신의 소리를 통해 한을 승화시키는 딸 송화 역의 오정해, 가난과 방랑이 싫어 도망쳤으나 그리움에 못 이겨 이들을 찾아나선 의붓 아들 동호 역의 김규철이 열연한 ‘서편제’. 진정한 예술혼이란 무엇이며 예술이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데요. 2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감동적이며 애잔한 슬픔의 발원지는 어디일까요. 다시 정일성 촬영 감독의 말을 들어봅니다.

“이 영화는 예쁘게 찍은 것이 아니라 아프게 찍은 것이다.”  
 

▲ 서편제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경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