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의 고향'에 '경아'가 있다면 '영자의 전성시대'에는 '영자'가 있습니다. 70년대를 대표하는 이 두 여성상은 '우리가 함부로 소유했다가 멋대로 버린, 도시가 죽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과 욕망에 눈 먼 거대 자본주의의 희생양이라는 공통 분모를 지니고 있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삶과 사랑을 들여다보려고 극장 앞에 길게 줄을 섰던 인파 중 상당수는 시골을 떠나 도시로 올라온 우리의 '누이들'이었습니다. 당시의 산업화 과정에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혹은 오빠나 남동생의 등록금을 대기 위해 헌신했던 누이들은 밤을 새워 번 돈으로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며 손수건을 적셨습니다. 그 시절 대중의 입에 오르내렸던 경아와 영자라는 이름은 바로 우리네 슬픈 자화상이었던 셈이지요.



소설가 조선작의 작품을 원작으로 김호선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자의 전성시대'는 75년 39만 8000명이 관람해 '별들의 고향'에 버금가는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무작정 상경해 부잣집 식모가 된 영자(염복순)는 주인집 철공소에서 일하는 직공 창수(송재호)와 사랑을 나눕니다. 그러나 창수가 입대해 베트남으로 떠나는 바람에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됩니다. 이후 영자는 주인집 아들에게 강간을 당한 뒤 쫓겨나 봉제공장 여공, 버스 안내양 등을 전전합니다. 어느날 만원 버스에서의 사고로 한쪽 팔을 잃게 되고 마침내 창녀로 전락하는데요. 영화는 영자의 잘린 팔이 건물 위로 솟구치는 숏 등 당시로서는 충격적 장면들을 통해 사회 비판적 힘을 획득합니다. 이는 자칫 멜로 드라마로 흐르기 쉬운 소재의 한계를 극복하려 한 감독의 의도로 읽힙니다.

예술 작품에 대한 통제와 검열이 극에 달했던 1974~75년에는 역설적으로 7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영화와 주제가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때부터 소위 '소설의 영화화'라는 새로운 풍조가 날개를 답니다. '별들의 고향'으로 대히트를 친 이장호·최인호 콤비의 두 번째 작품인 75년의 '어제 내린 비'도 그중 하나지요. '정원사', '내 마음의 풍차', '침묵의 소리' 등 최인호의 단편소설 세 개를 엮어 만든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서 15만 명을 동원했습니다. 이미 충무로의 촉망받는 신인으로 떠오른 이장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확인하고 싶다며 '정말 잘 만들겠다'는 각오로 메가폰을 잡았다고 하네요.



"영화 '어제 내린 비'가 주는 가장 큰 의미는 이장호 연출력의 참신한 성장이다. 번뜩이는 감수성과 젊은 감각은 화면 자체를 갓 목욕하고 나온 여인의 비누 냄새처럼 신선하게 채워주고 있다. 장석준의 촬영, 현동춘의 편집, 그리고 정성조의 음악은 좋은 앙상블을 이루었다."(영화평론가 변인식)

눈길을 끄는 점은 당시 이러한 젊은 예술인들에 의해 한국 영화의 OST(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시스템이 자리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바보들의 행진'의 송창식, '별들의 고향'의 강근식과 이장희, '영자의 전성시대'와 '어제 내린 비'의 정성조는 영상의 흐름과 함께하는 창작곡들을 적재 적소에 배치,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지요. 이들은 사이먼 앤 가펑클의 '졸업'(1967)으로 대표되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그랬던 것처럼 '고뇌하며 달리는' 청춘 군상, 혹은 사회 병폐를 상징적으로 요약하는 비극적 여인의 운명을 감각적인 음악으로 그려냈습니다.





▲ 윤형주 - 어제 내린 비




▲ 윤형주·박인희 - 사랑의 찬가(어제 내린 비)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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