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흥 반도 끝자락에 있는 녹동항 앞바다.

“가고 똑 가며 임과 이별했네/ 수만 리를 떨어져/ 각기 하늘 끝에 있네/ 길은 멀고 가로막혀 있으니/ 만날 날 어찌 알 수 있으리/ 북쪽 말은 북풍을 따르고/ 월나라의 새는 남쪽 가지에 깃드네/ 헤어진 날이 길어질수록/ 옷은 나날이 헐렁해지네/ 뜬 구름이 밝은 해를 가려/ 떠난 임 돌아오지 못하네/ 임 그리다 늙어 가는데/ 벌써 한 해가 저무는구나/ 나 버림받은들 다시 말하지 않을 터/ 임은 끼니 거르지 마소서” - ‘가고 또 가다’(중국 한나라 시대, 작자 미상)

인생은 결국 기다림의 연속인가요. 떠난 임을 기약 없이 기다리고 절망 속에서 희망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 속에 지니는 일’(이형기)이라는 고도의 인식에 이르고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여/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거든 구비구비 펴리라’(황진이)라는 절창을 낳기도 하지만 내공이 약한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고행이나 다름없습니다.

곰삭은 기다림을 여전히 내치지 못하고 있던 지난 금요일, 오랜 지기의 동행 제의를 핑계삼아 여행길에 나섰습니다. 요절 시인 김민부의 노래처럼 파도 소리 물새 소리에 눈물 흘린들 어떠랴, 차라리 그것도 괜찮겠다 싶어 남도 바다로 향했지요. 강남 터미널에서 출발한 밤 버스가 ‘여기서 인물 자랑하지 마라’는 순천에 우리를 내려놓은 시각이 다음 날 새벽 1시 전후. 잠시 눈을 붙인 후 ‘힘 자랑하지 마라’는 벌교를 거쳐 도착한 곳이 전라남도 고흥입니다.

▲ 녹동항.

한반도에서 봄이 가장 빨리 온다는 고흥 반도. 먼 태평양에서 바람에 실려 온 봄은 이곳 뭍에 상륙한 후에야 북상을 시작합니다. 지형이 복주머니처럼 생긴 고흥군은 남북 최장 길이가 95km인데요. 거금도, 소록도 같은 크고 작은 섬 160개를 거느리면서 8가지 특산품, 9가지 별미, 10가지의 비경을 뽐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다도해 해상공원 나로도 지구의 비경을 으뜸으로 치지만 다른 섬에서 바라보는 남해 풍경도 빼어납니다.

반도 남서쪽의 끄트머리 녹동항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뽀로로 달려간 항구는 생각보다 포근했습니다. 파도는 출렁이지 않고 찰랑거렸으며 갈매기들은 하늘을 날지 않고 낮은 포복으로 수면 위를 달렸습니다.
지난 날 소록도와 거금도행 배가 출항하던 이곳은 2009년 소록대교 개통으로 다소 쇠락했으나 인근 섬에서 잡히는 활어, 선어와 김, 미역, 멸치 등의 해산물이 모여드는 집결지임에는 변함이 없다지요. 운 좋게도 오후 2시 열리는 경매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검은 색 표지에 분필로 가격을 적은 손바닥만한 수첩을 머리 위로 들면 진행자가 단 몇 초 만에 낙찰자 번호를 외치는 역동적 모습이 대단히 신기했습니다.

녹동항 부두에서 바다를 향해 서면 오른편 전방 600m 지점에 작은 섬의 일부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 섬이 바로 말로만 듣던 ‘천형의 땅’ 소록도인데요. ‘보리피리’의 한하운(1919~1975) 시인이 나병 치료를 받으려 ‘숨 막히는 더위’를 뚫고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을 걸어 찾아갔던 곳입니다.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 리, 먼 전라도 길

- 한하운 ‘전라도 길’(1949) 부분

▲ 녹동항에서 바라다 본 소록대교와 대교 뒤편의 소록도.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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