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중견 시인 이성복(1952~ )의 작품 세계는 ‘자신의 골방’과 ‘우리의 광장’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개인적 서정의 감흥이 진하게 드러나는가 하면 한 시대의 이야기들을 껴안고자 하는 의지를 서사적으로 표출하기도 합니다. 거짓된 삶이 안겨주는 슬픔과 방황을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묘사하지요. 반어와 역설, 시행(詩行)의 지그재그 배열, 이질적인 이미지의 병치로써 뒤틀린 세상을 풍자한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지성사, 1980)를 통해 80년대 젊은 시인들의 상상력에 꺼지지 않는 ‘불’을 지폈는데요. 도무지 시가 써지지 않는 불편한 늦여름 밤. 2004년 대산문학상 시상식에서 밝힌 이성복의 ‘문학론’과 그의 시편들을 필사하며 힘을 내봅니다.

“문학이란 것은, 우리가 그것을 말하지 않고서는 나머지 모든 것이 허위가 되는 어떤 것, 혹은 그것을 말함으로써 그 나머지 모든 것들이 추문이 되고 스캔들이 되는 어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말한다는 것은 매우 창피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온하게 보이기도 하고 유치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문학은 그렇게 더럽고 어둡고 추한 자리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말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우리가 여기에 살아 있다는 것을 뜨겁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놈 저놈에서 이분 저분으로 끌어올려 줍니다.
비유적으로 문학은, 등을 긁을 때 오른손으로도 왼손으로도 닿지 않고, 위로 긁는대도 아래로 긁는대도 닿지 않는 어떤 공간이 있는 것과 같이, 도저히 침투할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따질 수 없는 어떤 공간에 대한 증명이고 그리움입니다.”


음악

이성복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굳이 내가 살지
않아도 될 삶
누구의 것도 아닌 입술
거기 내 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본다

-『호랑가시나무의 기억』(문학과지성사, 1993)에서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성복

1
내가 나를 구할 수 있을까
시가 시를 구할 수 있을까
왼손이 왼손을 부러뜨릴 수 있을까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천국은 말 속에 갇힘
천국의 벽과 자물쇠는 말 속에 갇힘
감옥과 죄수와 죄수의 희망은 말 속에 갇힘
말이 말 속에 갇힘, 갇힌 말이 가둔 말과 흘레붙음, 얼싸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2
나는 ‘덧없이’ 지리멸렬한 행동을 수식하기 위하여
내 나름으로 꿈꾼다 ‘덧없이’ 나는 ‘어느 날’
돌 속에 바람 불고 사냥개가 천사가 되는
‘어느 날’ 다시 칠해지는 관청의 회색 담벽
나는 ‘집요하게’ 한번 젖은 것은 다시 적시고
한번 껴안으면 안 떨어지는 나는 ‘집요하게’

내 시에는 종지부가 없다
당대의 폐품들을 열거하기 위하여?
나날의 횡설수설을 기록하기 위하여?

언젠가, 언젠가 나는 ‘부패에 대한 연구’를 완성 못 하리라

3
숟가락은 밥상 위에 잘 놓여 있고 발가락은 발끝에
얌전히 달려 있고 담뱃재는 재떨이 속에서 미소짓고
기차는 기차답게 기적을 울리고 개는 이따금 개처럼
짖어 개임을 알리고 나는 요를 깔고 드러눕는다 완벽한
허위 완전 범죄 축축한 공포,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여러 번 흔들어도 깨지 않은 잠, 나는 잠이었다
자면서 고통과 불행의 정당성을 밝혀냈고 반복법과
기다림의 이데올로기를 완성했다 나는 놀고 먹지 않았다
끊임없이 왜 사는지 물었고 끊임없이 희망을 접어 날렸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째서 육교 위에
버섯이 자라고 버젓이 비둘기는 수박 껍데기를 핥는가
어째서 맨발로, 진흙 바닥에, 헝클어진 머리, 몸빼이 차림의
젊은 여인은 통곡하는가 어째서 통곡과 어리석음과
부질없음의 표현은 통곡과 어리석음과 부질없음이
아닌가 어째서 시는 귀족적인가 어째서 귀족적이 아닌가

식은 밥, 식은 밥을 깨우지 못하는 호각 소리-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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