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길, 잃어야겠네 '세상 밖으로'


길, 잃어야겠네

김채운

열네 살, 첫 달거리가 끝나던 날
월남전에서 왼다리 잃은 삼촌의
자전거 훔쳐 타고 내달린 적 있지
숨 가쁘게 페달을 밟으면 두 바퀴에 칭칭
햇살은 감겨들고 한달음이면 솟구쳐 오르던
언덕배기 바람보다 더 빠르게
다리를 건너고 들판을 지나 아랫마을까지

되짚어올 만큼만 달렸을 뿐
마을의 반경 십 리도 벗어나지 못했네
떠남과 돌아옴의 경계 그 안전선 언저리에서
가슴 졸이며 머뭇거렸을 뿐

밋밋한 길바닥 같은 마흔 해

나 이제라도 길 잃어야겠네
해묵은 페달 기운차게 밟아
사뿐히 바람을 싣고 녹슨 바퀴살에
눈부신 그리움 챙챙 감으며
당신 향한 일방통행의 길 좇아
삼천리보다 더 머나먼 세상 밖으로
나 이제부터

가가겨겨

김채운

울 엄마 최종학력은 국민학교 1년 중퇴
가까스로 쓸 줄 아는 이름 석 자와 익힌 셈법으로
육 남매 똑 고르게 대학물 먹여 가방끈 늘여놓고도
눈감는 순간까지 공부 따윈 넘보지 않겠다더니

– 공부도 다 때가 있는 법이잖여, 근디 나한텐 시방이 그때여

걸음마 내딛듯 한 자 한 자 짚어 읽으시며
어줍살스레 잡은 연필로 빈 칸도 채워나가신다
셋째딸이 쓰는 시
몸소 읽어야겠다고
또박또박 따라도 써봐야겠다고

– 시집『활어』(시와에세이, 2011)에서


▲ 이성원 – 엄마야 누나야 


▲ 이선희 – 오빠 생각 


▲ 박인희 – 섬집 아기


비의 무덤

박지우

비가 무단횡단을 해요
길들이
깜박거리며 경보음을 울려요

뿌리가 잘린 화환들
억지웃음을 짓고 있어요
불륜의 신나 냄새를 풍기는 여관골목에서
앨리스의 고양이가 웃고 있어요

배배꼬인 날씨를 진공포장하고 싶어요

과거의 시간이 출렁이는 모형 바다 속으로
싸움을 부추기던 간판들이 떠내려가요
폐기된 약속들이 모여
미래의 차표를 구걸해요

조각조각 떠도는 허공
계단을 오르지 못하는 새들이 온종일 젖어 있어요
자전거보관소에서는
유기해버린 시간이 녹슬어가고 있어요

세상은 비의 무덤
무너진 하늘이 울컥해요

앓는 빗소리가 잠 속을 떠돌아요

롤리팝

박지우

도시의 막다른 골목 그곳에 가면 그가 있지 인사동과 종로를 떠도는 백 년도 넘은 어둠 속에 그가 있지 마법에 걸린 골목을 미로처럼 그와 함께 걷지 출입금지와 경고가 붙어 있는 곳 우린 수상한 사람이 되지 폐허가 되어버린 적산가옥 앞 어둠에 낡은 풍경이 걸려 있지 핸드폰에서 울어대는 시끄러운 얼굴을 접으며 내 인생은 몇 번이나 접혔을까 생각하지 시간을 꿰매던 바람이 골목골목 매달리지 옛날 이야기가 살고 있는 내 일기장 첫 페이지에 그가 있지 가끔 끓어 넘치는 생각을 안고 싶은 날이면 그곳에 가지 달콤한 기억에 혀를 대면 내 인생 폭풍의 눈이었던 그와의 기억이 회오리처럼 일어나지 골목과 골목 사이에 갇혀 쇼팽을 타고르를 얘기하며 희망으로 가는 비밀번호를 찾던 피카소의 골목 그곳에 가면 그가 있지 나는 그를 조금씩 조금씩 아껴먹지 고장난 시계가 찰칵거리는 돌체 라 세라*

* 돌체 라 세라: 이탈리아어로 달콤한 오후.

– 시집『롤리팝』(북인, 2012)에서


▲ Irini Kyriakidou – Windmills of Your Mind


▲ Jessye Norman – Windmills of Your Mind


▲ Dusty Springfield – Windmills of Your Mind(1969)

김채운 시인은 보은 출생으로 2010년 계간『시에』로 등단했습니다. 사회의 후미진 곳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지녔으며 유년의 기억에서 오래된 미래의 가치를 발견하고 있지요. 도회의 달콤 쌉쌀한 서정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박지우 시인은 옥천에서 태어나 2009년 『시선』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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