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길’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탈리아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1920~1993)의 대표작 가운데 1963년 작품 ‘8과 1/2’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뚜렷한 스토리와 주제가 없이 무수한 영상의 조각들만 이어지는데요.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이 모자이크 식으로 뒤엉켜 있기 때문에 무척 난해하지만 세계 영화계에 큰 충격을 준 걸작으로 평가됩니다. 한 인간의 의식 세계를 이만큼 적나라하게 영상화한 작품은 펠리니 이후 아직까지 없다고들 하지요.



‘8과 1/2’이란 숫자는 펠리니가 그때까지 만든 영화의 합계를 뜻합니다. 당시까지 그가 연출한 일곱 편의 영화와 세 편의 합작 영화를 모두 더하면 합이 8과 1/2이 라는 겁니다. 합작품 한 편을 ‘절반’으로 계산한 게지요.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이 영화는 펠리니의 자서전적인 작품으로 자신의 영화 세계와 좌절, 실패, 사랑, 꿈들을 짜깁기하여 보여줍니다.

영화 감독 귀도 안젤미(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온천으로 휴양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가 도착하자마자 새 작품을 시작하려는 영화의 제작자, 스크립터, 배우, 정부, 아내(아누크 에메), 고인인 부모가 나타나 휴식을 방해합니다. 자신의 어렸을 적 모습, 어린 그에게 죄악의 본질을 가르쳐주었던 신부가 등장하고 연기에 질식해 죽는 악몽까지 꾸게 돼 한 순간도 마음 놓고 쉴 수가 없습니다. 귀도는 이 왁자지껄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꿈을 꿉니다. 그런 그의 꿈속에 한 ‘완전한 여인’(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은 귀도가 일상의 압박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로 그려지는데요.


영화 속 귀도처럼 모종(?)의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리던 나에게도 짧지만 이색적인 ‘탈출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문인과 공군의 교류 창구인 ‘창공 클럽’ 제주도 행사에 초대를 받은 게지요. 이 단체는 6․25전쟁 당시 마해송, 조지훈, 박두진 같은 문인들에 의해 결성됐던 ‘창공 구락부’가 전신으로 지난 2006년 부활했습니다. 도종환 시인에 이어 현재 고운기 시인이 회장을 맡고 있지요. 공군 수송기 탑승, 항공기 제작 현장 견학, 이어도까지 커버하는 레이다 기지 방문, 비행 시뮬레이터 체험은 흐물거리던 나른한 일상을 수직으로 곧추세웠고요. 장병들과 함께 했던 시 낭송은 나름 신선한 경험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외돌개가 우뚝 서 있는 서귀포 바다를 끼고 도는 올레 7코스와 마라도행 유람선 선착장을 바라보며 송악산을 오르는 올레 10코스도 좋았습니다. 초면은 초면대로, 구면은 구면대로 정담을 나누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던 일행. 다들 즐겁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아름답기로는 산방산과 송악산을 좌우에 둔 숙소 앞 밤바다를 빼놓을 수 없겠네요. 태평양에서 불어온 강력한 바람에 몸을 맡긴 파도의 용틀임. 부서지면 다시 밀려오고, 또다시 부서지는 장관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는데요. 생성과 소멸의 윤회를 온몸으로 말하는 비장미에 마음이 시려왔습니다. 조그만 상처에도 아프다고 난리 치며 도피처를 찾는 비겁한 삶이 부끄러워졌지요.

2박 3일의 아주 특수한 일탈. 모양새는 ‘일상 탈출’이었으나 ‘일상 속에서’ 살아갈 힘을 다시 얻은 알찬 나날이었습니다.


▲ 제주시 이호 해수욕장.


▲ 올레 10코스에서 만나게 되는 마라도행 유람선 선착장.


▲ 올레 10코스를 걷다가 뒤 돌아서서 한 컷.


▲ 올레 10코스 송악산에서 바라다본 산방산(오른쪽).


▲ 올레 7코스 외돌개가 있는 서귀포 앞바다.


▲ 올레 7코스에서 내려다 본 바다.


▲ 올레 7코스와 함께 이어지는 절경.


▲ 올레 7코스 중 해안의 바둑 형상 바위.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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