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태산 품에 안긴 영국사 

정령의 숨결이 느껴지는 산줄기가 풍경의 배후를 떡하니 장악하고 있습니다. 가람 배치가 꽤 안정적인 고찰이 오래된 은행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중심을 잡고 있고요. 새들을 날아오게 만들었다는 명창 이날치의 새타령처럼 물 흐르는 듯한 자연의 노래에 귀가 솔깃합니다. 햇빛과 바람, 나무와 풀, 흙과 바위의 들숨 날숨 소리…. 한 폭의 산수화 같은 이 아늑한 공간에 한 사내가 작은 점으로 움직입니다. 발걸음 따라 점점 확장되는 여백, 그 속으로 넉넉한 인간의 그림자 한 폭 성큼 들어섭니다.  

시인 양문규. 가슴 넉넉해 뒷끝 없이 소탈한 사람. 외모는 강골인데 눈물 많고 정 많아 뒤돌아서면 울고 있을 것 같은 여린 마음의 소유자. 그러면서도 자유자재하고 신출귀몰하고 구석구석 기묘하기 그지없는 우리 시대의 문제적(?) 인물. 서울 생활로부터 스스로를 유폐시켜 낙향한 지 10여 년, 옛 생각 껴안고 충북 영동의 천태산 여여산방에 엎드려 마음의 풍경을 펼쳐온 로맨티스트지요. 민예총 총무국장, 실천문학사 기획실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한 송이 꽃, 하나의 돌멩이처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 끊임없이 눈 맞추며 공동체적 삶의 숨결을 읽어내던 그가 산문집『너무도 큰 당신』(시와에세이)을 통해 자신의 굴곡 진 개인사를 뒤돌아 보는데요. 진하게 배어 나오는 인생의 기쁨과 환희, 아픔과 상처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가슴을 뭉클하게 만듭니다. 수 년 동안 ‘천태산은행나무를사랑하는사람들’의 대표를 맡으며 체험한 생명의 소중함과 자연이 주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도 진솔하고 아기자기합니다.

“사랑은 크고 높은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도 그러하리라 믿습니다. 작고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음 끝까지 사랑하는 큰 사랑이 삶 속에 있었으면 합니다. 때로는 가슴을 아프고 쓰리게 하는 고통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그것으로 견디기 어려운 슬픔도 있겠지요.

어찌 그것뿐이겠습니까.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으로부터 괴로움의 마음을 둘 곳을 찾아 먼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겠지요. 지난날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밤 당신 곁에서 잠들고 싶습니다. 다시 사랑을 위하여 당신 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당신이 세상을 향해 사랑하는 마음을 뼛속까지 배우고 싶은 밤입니다.”


저자는 천태산 영국사 은행나무를 ‘당신’으로 지칭하면서 그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23호로 지정된 아름드리로서 이곳의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인데요. 높이 31미터, 가슴높이 둘레는 11미터로 수령이 자그마치 천 년이 넘습니다. 아마 이 산에서 가장 나이가 많을 듯 싶네요. 흥미로운 건 나라에 환란이나 재난이 있을 때마다 기이하게 운다는 겁니다.

“여름이면 반딧불이가 나는 천태산은 생태계의 보고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노루, 고라니, 족제비, 참다람쥐, 오소리, 너구리 등의 들짐승이 영국사를 제집 드나들 듯 합니다. 부엉이, 뻐꾹새, 서쪽새, 딱따구리, 후투티, 꾀꼬리 같은 날짐승도 살지요. 머루, 다래, 으름이 그득하고 봄부터 가을까지 토종 식물들도 꽃을 피우고 지우며 어우러집니다.”

대지에 뿌리를 내린 평생 농부인 부친을 향한 저자의 사랑이 절절한 그리움으로 다가옵니다. 신경림, 함민복, 박운식 시인과 우정을 쌓아 나가는 품이 넉넉하고 윤중호 시인과의 영원한 이별은 콧등이 시큰해집니다. 시인을 ‘1인 교주이자 그 자신이 1인 신도’라 노래하면서 ‘일생 동안 허비할 말의 허기를 새기리라’ 다짐한 조정권 시인처럼 그도 이때까지 소비하지 못했던 언어의 목마름을 이 책에서 마음껏 분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아침마다/몸을 푸는,/창 밖 대숲을 본다//깊고 푸른 절정,/한 생을/브레이크도 없이/절 속의 새가 날고 있다//나, 해진 몸을 이끌고/대숲 속으로 입주하고 싶다(양문규「대숲 속으로」전문)

무욕을 지향하는 그의 걸림 없는 생이 오늘도 빛나고 있습니다.


                                         ▲ 수령이 천 년을 넘는 은행나무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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