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바람 불고 비 오면


장마도 끝났고 태풍이 부는 것도 아닌데 웬 비가 이리 많이 오는지요. 지난 장마 기간 26일 동안 내린 비가 802㎜였는데 이번엔 서울서만 이틀새 400㎜ 가까이 왔다니 파괴력이 상상이 갑니다. 산사태와 정전이 발생하고 지하철은 스톱했으며 펜션이 붕괴돼 많은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부상자가 많아 앞으로 몇 명이 더 목숨을 잃게 될지 모릅니다.

사무실 의자만 돌리면 펼쳐지는 창밖 여의도 샛강의 버드나무 군락은 허리까지 흙탕물로 뒤덮였고요. 이미 침수된 88도로 옆 산책길에 주차하고 있던 차들도 모두 물에 잠겨 등짝만 빼꼼히 내밀고 있습니다. 와중에 한 방송국 건물이 침수됐다는 보도까지 나옵니다. 뉴스가 중단될 상황이라는군요. 연이어 들어오는 특보가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인간이란 자연 앞에 이토록 무기력한 존재였던가요.

하긴 인간을 무기력에 복무하도록 만드는 게 어디 자연뿐이겠습니까. 관계 속의 인간 사이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지침이 있어 이해력이 모자라거나 잘못된 사람은 강자 앞에서 절절매기 일쑤지요. 정치권력이나 재물이 속한 세속적 관계 앞에서, 또는 사랑과 같은 지극히 정신적인 메시지를 놓고 울고 웃습니다. 부족한 사람들 더 이상의 피해 없게 비 좀 그만 왔으면 좋겠네요. 졸시 한 편 올립니다.


백사마을, 오늘 같은 날은

늑대가 먹거리 찾아 내려오던
44년 전 비탈길 그대로예요
청계천서, 용산서, 안암동서 등 떠밀려
노원들판 건넌 유목민들
세대당 8평씩 배정받아 낮은 지붕 얹었다지요
절집, 교회당 들어선 골목마다
이주민 어깨 다독이던 말씀 지금도 낭랑하고
샤넬클럽, 계룡산박수, 백성세탁소, 수퍼
간판도 깐깐하게 살아 남았어요
중계동 104번지 백사마을,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는

손찌검하는 아빠 안 보겠다고 보따리 싼
엄마가 보고 싶어
수업료 못 내는 학교는 뭐하러 다니냐며
애기똥풀 꺾으며 집 나갔던 딸
타지에서 중년 넘기는 일이 그리도 힘들었는지
며느리밥풀꽃 되어 돌아온다는
안타까운 소식 종종 들린다지요
오늘같이 바람 부는 날은

한 장에 6원50전 하던 연탄 못 사
웃풍 매서워도 불구멍 막고 살았더랬어요
연탄은행 생겨 하루 3장 나눠 주지만 아까워 못 때고
재개발 바람 불어 춥기는 매한가지
철거 시작되면 이제 또
어디로 가야 하나요
인생의 종점에서 돌아보자고
작심하고 들어온 산비탈인데
마을 입구 종점의 마지막 버스 출발하듯
그렇게 떠나야만 하는 걸까요

오늘같이 바람 부는 날은
앞날 걱정 연대기처럼 길게 드리운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의 마을에
추억의 인증샷 건지겠다며
은퇴한 여배우 축 처진 젖가슴 보여달라고
생떼 쓰는 고급 카메라들 셔터 소리가
철없이, 철없이
진상손님 같은

– 문학무크『시에티카』제5호, 2011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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