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여성학자 박혜란의 '다시, 나이듦에 대하여'


세상에는 나이듦에 대한 ‘교과서’가 없습니다. ‘참고서’라는 것들도 이름과는 달리 그리 참고할 만한 것이 없고요. 간혹 시리고 삐걱거릴 때 유명하다는 멘토의 처방을 받아도 딱 부러지는 효험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청순한 미모의 주연 탤런트가 어느 순간 이모·고모가 되고 오래지 않아 ‘우리 손자가 어떻고…’ 떠드는 할머니로 역할이 바뀌듯 우리는 그렇게 늙어갈 뿐입니다.

어떤 시인에게 삶은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런 낭만과 초연함을 노래할 형편이 못 됩니다. 유수 같은 시간 앞에서 패자처럼 무릎 꿇고 불면의 밤을 보내기 일쑤지요. 한 편의 영화 같지만 엔지(NG)도, 편집도 허용되지 않는 인생. 문제는 이제부터 남은 시간입니다. 수명이 팔십을 넘어 구십, 백 세까지 거론되니까요. 지금부터라도 주어진 러닝 타임 내에서 자기만의 ‘작품’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여성학자 박혜란씨가 <다시, 나이듦에 대하여>로 새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습니다. 전작 <나이듦에 대하여>로 낙양의 지가를 올린 이후 10년 만인데요. ‘이웃집 마실 가듯’ 떠났다가 ‘언제 떠났나 싶게’ 돌아온 게지요. 세상의 행간을 꿰뚫는 성찰은 여전히 빛나되 인생을 곱씹는 맛과 향은 더욱 그윽해졌습니다. 쉽게 씌어진 문장 속에 60대 중반의 곱고 예쁘게 발효된 세월이 꼼지락거리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한 달이 요즘의 1년이다. (…) 눈 깜짝할 사이 손주가 다섯이다. 그런데도 선배들은 겁을 준다. 60대만 해도 시간이 아직 느린 편이라고. 70이 넘어가면 1년이 하루처럼 흘러간단다. 그러니 60대는 달마다 늙어가지만 70대는 날마다 늙어 가는 셈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그럴 것도 같다.”

쉰을 넘을 때까지만 해도 총기로 똘똘 뭉쳤다 해서 ‘총명탕’으로 불렸다는 저자. 나이 들어 건망증 때문에 손해를 보고 신문 활자가 어른거리며 음식 맛도 못 느끼게 됐다고 탄식하지만 특유의 라이프 스타일로 인생 후반기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방법은 철저히 ‘혼자 놀기’입니다. 외식, 영화는 물론 여행과 등산도 나 홀로 즐긴다고 하네요. 심지어 외국에 거주하는 남편과 떨어져 사는 맛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랍니다.

‘그 연세에 대단하십니다’라는 칭찬은 싫으나 ‘선생님처럼 나이 들면 좋겠다’는 말은 괜찮다는 까탈스런(?) 여자. 노인을 희화화한 TV프로그램이 밉지만 채널은 끝까지 돌리지 못하고요. 좋아하는 술을 함께 마실 친구가 줄어들어 안타깝다는 ‘대국민 호소’엔 인간적 소탈함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아들은 며느리의 남편이고 며느리는 딸이 아니다, 고로 아들도 며느리도 손님이라는 新시어머니십계명을 만들어 전국의 시부모들에게 홍보 중이기도 하지요. 이런 그녀에게도 시련의 계절은 있었습니다.

“10여 년 전 남편의 사업 실패와 나의 건강 악화가 겹쳐 죽을 만큼 괴로웠을 때가 있었다. 남자 아이 셋을 키우느라 20여 년을 아파트 1층에서만 살다가 전세로 이사 간 곳이 12층이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베란다 쪽은 내다보지도 않았다. 그냥 떨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죽음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어떨까요. 일단 이만큼 살았으면 아쉬울 게 없다는 생각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는 듯합니다. 지금부터 한 시간 후도 좋고 5년 후, 10년 후도 괜찮다는데…. 다만 치매에 걸리거나 오래 앓다가 죽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희망을 피력합니다. 혹시 중병에 걸려 의식이 없게 되면 서로 안락사를 시켜주기로 남편과 합의까지 했다는데요. 그럼에도 ‘내가 정말 이렇게 쿨하게 생각하는 걸까? 방송용 멘트는 아닌가’ 하는 회의를 숨기지는 못합니다.

“50대 초반 좀 건방진 제목으로 책을 냈을 때만 해도 내 나이가 꽤 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 나이의 사람들을 보니 새파랗다. 무얼 시작해도 늦지 않은 나이다. 하긴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가 어디 있으랴. 무얼 해도 10년쯤 죽자 하고 파면 최고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흉내 낼 수 있잖은가. 스스로 흡족하면 되는 거지, 꼭 최고가 될 필요는 없다는 걸 나이 든 사람들은 다 안다.”

생전 처음 백화점에서 진분홍 봄 잠바를 한 벌 사들고 ‘나도 패셔니스타’라 외치고 다음엔 뽀글 파마를 해볼까 고민하는 전형적 한국의 어머니. 가치 있는 노년을 향한 진지한 ‘인풋’으로 자신만의 자유와 여유라는 ‘아웃 풋’을 쟁취한 일생이 돋보입니다. 책날개의 그녀가 우리의 굽은 등에 손을 얹고 봄처녀처럼 속삭이네요. 나이 든다는 거, 생각보다 괜찮은 일이라고….
 
*** 이 글은 월간 ‘공무원연금’ 4월호 기고문입니다. 

마산에서 태어나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했습니다. 주부생활ㆍ일요신문을 거쳐 한국경제신문에 입사,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으로 일했고요.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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