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바람난 봄꽃, 바람난 詩心

사무실 밖은 바야흐로 꽃대궐입니다. 국회의사당 뒤편을 돌아나와 대방교 쪽으로 뻗은 여의도 윤중제따라 길게 어깨를 맞대고 있는 벚나무 행렬. 한강 본류에서 살짝 몸을 삐쳐 물꼬를 튼 샛강과 연초록으로 한껏 물이 오른 버들 군락 위로 무수한 꽃잎을 흩뿌리고 있습니다. 절기에 쫓겨 마지못해 찾아온 봄바람이 그리 반가운지, 홀리기라도 한 듯 저리도 분분합니다. 바람이 내달리면 바로 뒤따르고 다시 도망가면 쫓아가고…. 눈이 시립니다.

벚꽃 날리는 풍경은 일본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감초’입니다. 산골마을 괴짜 가족 이야기를 다룬 ‘녹차의 맛’에 등장하는 커다란 벚나무는 압권이죠. 스크린을 가득 채운 꽃잎의 향연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합니다. 이와이 슌지의 ‘4월 이야기’ 여주인공이 대학생이 되어 새로 이사 오는 집에도 눈처럼 쏟아져내리는데요. 그녀의 스웨터 속으로 침투(?)한 꽃잎들을 눈을 털어내듯 떨어뜨리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있잖아. 초속 5센티미터래.”
“응, 뭐가?”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가…”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의 소년과 소녀 앞에도 꽃은 날리지요. ‘어느 정도의 속도로 살아야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는 카피가 화두처럼 긴 여운을 남기는 영화입니다. 벚꽃의 행로따라 시간은 흐르고… 성인이 된 두 사람 사이를 통과하는 기차, 기다릴 것 같았지만 그 자리에 없는 얼굴… 엔딩은 아련하다못해 처연합니다.    

시에문학회원인 전건호 시인의「신처용가」전문을 소개합니다. 애간장이 타기는 이 시의 화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봄날의 유혹과 질투가 아름답게 묘사된 작품이지요.

그날은 명동에서 술 얼콰해져
남산에 올랐던 거라
달빛 어찌 그리 유장하던지
벚꽃 펑펑 튀밥처럼 터지는 봄밤이었어
지난 생 내자였을지도 모를 여자
물감빛 원피스 하늘거리며
꽃잎 밟으며 걸어오는 거라
그냥 말 한번 걸어보려 다가선 것 뿐인데
짐짓 바삐 갈곳이라도 있는 양
도리질하며 꽃비 속으로 뛰어가는 거라
멍하니 새초롬한 뒷모습만 쫒는데
길섶 문득 건들바람 일어
나를 에돌아 달려가더니
손길 외면한 여자를 더듬어대는 거라
순간 열이 확 오르는 거라
치마를 슬쩍 들치는가 하면
봉긋한 젖가슴 더듬고 머리칼 쓰다듬는데도
수줍은 듯 옷깃 여미는 척만 하며
가만히 몸을 맡기는 게 아닌가
아슬아슬 실 눈 뜨고 바라보는데
바람은 꽃잎으로 길을 덮어 원앙금침 펼치는게 아닌가
한번 더 붙잡았으면 품에 안을 수 있었을지 모를 여자
바람에 놀아나는 걸
눈 뻔히 뜨고 보면서
꽃그늘 아래 피실피실 웃음만 나오는 거라
교교한 달빛 받으며 산길 내려서는데
덩실덩실 어깨춤까지 나오는 거라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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