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 2개월째

입력 2009-10-13 11:20 수정 2011-07-04 17:41
빵빵한 대기업의 경영자로 앞만 보고 달리던 A씨. 피치 못할 사정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근데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피 터지는 경쟁이 있나, 남 눈치 볼 일이 있나. 한 달 두 달 ‘무위 도식도 꽤 괜찮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세 달이 넘어가자 좀이 쑤셔오면서 지칠 때까지 먹고 자자는 원대한 포부에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예상하지 못했던 불안감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밀려왔다. 그때 ‘일’이란 악마가 잽싸게 그를 꼬드겼다. “놀아보니 어때, 괜찮아? 이젠 지겨워서 죽겠고 앞날이 걱정돼서 죽겠지? 그래, 다시 뛰는 거야. 날 버리고 도망 가면 발병밖에 더 나겠어?” 
 
친구라도 만나야 살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적당한 대상을 물색해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선심이라도 쓰듯 ‘얼굴 한 번 보지 뭐’ 했다. 시간에 맞춰 대충 옷을 걸치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실로 얼마 만에 타보는 버스인가. 학교 다닐 적의 추억을 더듬으며 멀뚱멀뚱 서 있는데 뭔가 이상하고 낯설었다. ‘버스 문이 원래 두 개였었나? 그건 그렇다치고 어디로 타지? 앞으로도 타고 뒤로도 타네.’ 사람들에게 물어보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눈치만 보는데 불현 듯 구세주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지. 마누라가 있잖아.’ 자신 있게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번엔 집 전화 번호가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젠장…

 ‘어쨌든 타고 보자.’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앞 문 계단을 올랐다. 근데 이건 또 뭐하는 건가. 사람들이 지갑 같은 걸 꺼내 기사에게 보이는 게 아닌가. 요금 생각도 못한 채 ‘아하! 버스 타는 데도 신분증을 보여줘야 하는 거구나’ 싶었다. 못할 것 없지. 자기 얼굴이 박힌 주민등록증을 기사 양반 코 앞에 들이댄 후 보무도 당당하게 버스 안으로 들어섰다. 누가 보아도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러나 작금의 대한민국 보통 사람치고 세상살이 무지몽매한 이 손님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랴. 비수 같은 기사의 호통이 그의 뒷통수를 후려치는 데에는 채 3초가 안 걸렸다. “거, 점잖게 생긴 양반! 요금 내슈.”

위 이야기는 내가 썼던 서평 중에서 인용한 어느 전직 CEO의 실화입니다. 지금의 내 생활이 이와 비슷합니다. 정년퇴직 2개월째, 하루하루 두서가 없습니다. 여름 내내 돌렸던 선풍기를 청소하느라 해체하고선 날개의 앞뒤를 몰라 손으로 돌려 바람 나오는 방향을 찾기도 하고 안 풀어도 될 나사를 빼 놓고선 허허 하고 웃습니다. 공과금 고지서를 들고 은행에 가서는 기계에 통장만 넣으면 해결될 일을 기꺼이(?) 현금을 찾아 납부하겠다고 해 행원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담배를 찾고, 가스 불에 커피 물을 올려놓고 실컷 딴 짓을 해 그릇을 태운 적도 여러 번입니다. 주어진 시간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왜 그렇게 정신이 없는지… 요즘 그렇게 삽니다.     
 
칼럼 첫 회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많이 사랑해 주세요.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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