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다큐소설] 오키나와 (8)...내가 뭘 해야 할까?

이수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혹함에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맥박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울렸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제어하지 위해 이수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가라앉혔다. 미군 전투기는 움직이는 물체라면 그게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총알을 내뿜었다.

“움직이면 죽는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이수는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근처엔 콘크리트건물이 하나도 없어 폭탄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데다 이수를 둘러싼 가옥들이 속속 불 타들어오는 바람에 메케한 연기에 질식해 죽을 판이었다.

더욱이 건너편에 감춰진 탄약 창고가 폭발하면 한순간에 온몸이 불타버릴 테니까, 죽든 살든 여기를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어차피 죽을 바엔 도망치자.”

이수는 연기를 마시는 바람에 심하게 콜록거리며, 나카타 반장에게 아래쪽으로 더 내려가 우후조메 거리에 가서 오키나와우편국 지하호로 피신하자고 소리쳤다.

“아냐, 큰 건물은 더 위험해”

나카타 반장은 이수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다. 하긴, 요새 며칠 째 나카타는 이수가 제안하는 거라면 모조리 거절했다. 그와 함께 다니는 자체를 소름끼쳐 했다. 왜 황군(皇軍)의 하사관이 일개 조선 군부와 함께 어울려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중얼거렸다.

나카타는 자신을 이런 여건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이치카와 중대장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나카타는 며칠 전부터 이수보다 이치카와 중대장을 되레 더 욕하기 시작했다.

“이치카와, 바가야로…그놈은 중대장 자격이 없어. 언젠간 내가 그놈을 영창에 처넣을 거야”

닷새 전 나하 부두에 주류 등 군수품을 하역하러 나갔을 때 나카타가 몰래 정종 5병을 훔치는 걸 발견하고 “그런 짓을 하면 안 돼”라고 애써 말리자, 그는 발광하듯이 화를 내며 뽑아 이수에게 총구를 들이댔다.

“이시타, 두고 봐. 언젠간 널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 테니까”

표독한 나카타가 이수에게 언젠간 틀림없이 보복하겠지만, 그게 두려워 저런 망나니에게 굽실거릴 이유는 손톱만큼도 없다는 게 이수의 판단이었다.

나카타도 이수가 조선인 군부이긴 하지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기에게 허리를 굽히진 않을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선지 나카타는 이수에게 아무런 손짓도 하지 않고, 갑자기 총을 챙겨 메더니 혼자서 와카사 방향으로 홱 도망쳐버렸다.

“나카타, 안돼. 그쪽이 더 위험해”

이수가 큰소리로 말렸지만, 나카타는 가잔비라 방향과는 정반대쪽으로 도망쳐버렸다. 이때 미군 그루먼 1대가 기관총으로 전봇대 하나를 쓰러트리고, 나카타 반장이 뛰어가는 방향으로 따라가면서 총알을 갈겼다. 그는 위태위태하게 달리다가 총과 모자를 다 내던져버리고, 오른쪽 골목으로 쏙 사라졌다.

<나하를 공습하는 미군 함재기. 사진=미국국립문서관, 나하역사박물관>

드디어 이수는 혼자 움직여야 했다. 하늘에서 잘 내려다보이지 않는 처마의 밑을 타고 돌아 우후조메 거리로 내려갔다. 오키나와물산을 지나 오키나와우편국지하로 뛰어들 작정이었다. 하지만 아까 ‘큰 건물은 위험해’란 나카타의 한마디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 벼락이 칠 때도 큰 바위나 큰 나무아래 숨으면 위험하다고 하지 않나”

더구나 우편국건물의 위쪽 창문들이 동그랗게 생겨 미군들이 이를 포구로 오인하고 폭격을 가할 위험이 있기도 했다.

또 나하 시청사도 콘크리트건물이긴 하지만 그 앞에 서있는 이 도시에서 제일 높은 사각기둥의 감시탑이 공격의 대상이 되면 한 순간에 온몸이 조각조각으로 찢어지고 날것이 분명했다.

하는 수 없이 이수는 우편국 바로 뒤에 있는 3층짜리 단단한 철근콘크리트 건물인 전화국의 지하벙커로 피신하기로 했다. 그는 류큐직물조합 건물사이를 비집고 돌아 전화국 지하벙커 안으로 뛰어들었다.

<나하박물관에 있는 폭격직전의 나하중심가 모형. 사진=이파>

지하벙커엔 아직 출근한 사람이 없어 텅 비어있었다. 벙커 안이 너무 어두컴컴해 전등불 스위치를 찾아 켜봤지만, 미군의 폭격으로 이미 전기가 나간 상태였다.

전화국 벙커에 보급품 상자를 내려놓고 15분쯤 지났을 때, 이 폭탄 소나기를 뚫고 30대중반으로 보이는 전화국 직원 한사람이 지하벙커로 발자국소리를 울리며 걸어 내려왔다. 이수가 먼저 그에게 반갑게 말을 건넸다.

“지금, 밖에 다닐 수 있어요?”

“어?…아니오, 위험해요..고사포 파편이 마구 쏟아져서..”

“그런데 어떻게 출근했어요?”

“빨리 통신선을 복구해야 하니까요…”

이수는 ‘통신선을 빨리 복구해야 한다’는 전화국직원의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하늘에서 폭탄과 기관총알이 쏟아진 이후부터 이수는 단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라는 것에만 매달렸는데, 이 전화국직원은 자신이 살아남는데 신경을 쓰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뭘 해야 할까’를 염두에 두고 이 위험을 뚫고 출근한 거였다.

전화국직원은 공습이 여전히 계속되자 지하벙커에 방치된 물품 상자들을 가지런히 쌓아놓는 일에 열중했다. 그런데 작업을 하는 그 직원의 걸음걸이가 조금 불편해보였다. 눈여겨보니 그의 발목에서 피가 계속 흘렀다.

“아니, 발목에 피가 나요. 통신선을 복구하기 전에 발목부터 먼저 복구해야 되겠는데요?”

본디 군수품은 밀봉을 뜯지 않고 전달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수는 보급 상자를 뜯어 소독약과 연고를 꺼내 전화국직원의 발목을 붕대로 단단히 감아주었다.

“고맙습니다. 이제 공습을 좀 멈춘 것 같습니다”

그 직원은 통신선 복구하기 위해 전화국 계단을 가볍게 밟으며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를 따라 3층 옥상에 올라가보니, 거기엔 통신용 철탑이 하나 서 있었다. 그 직원은 철탑 위를 거미처럼 재빨리 타고 올라갔다. 그러는 동안 이수는 항구 쪽을 내려다봤다.

시청의 감시탑 건물에 가려 바다전체가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부두에 정착해있던 거대한 수송선의 선체가 기울어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뱃머리가 하늘로 솟아올라 있었다.

나하 부두 가까이 있는 군수물자집적소들이 모두 불타면서 도시의 절반이 연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탄환보관소에 불이 붙어 포탄과 총알 터지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귀를 찢었다.

열심히 통신회선을 고치고 있는 전화국 직원에게 이수는 큰소리로 조심하라고 인사를 한 뒤, 지하벙커로 내려가서 보급품 상자를 다시 어깨에 메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사냥꾼을 따돌리는 짐승처럼 이수는 재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전화국을 빠져나오자마자 곧장 시청 쪽으로 가지 않고, 건너편 소방펌프를 돌아 소바집인 만닌야(万年屋)의 처마 밑을 돌았다.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그는 안경점인 메이시도(明視堂)을 돌아서다가 미군 그루먼에 발각되어 피할 수 없을 만큼의 격렬한 기총소사를 받았다.

이파(李波)...화가 기자 교수 연구소장 사장 등 여러가지 일을 했다.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15년전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꾸준히 오키나와 현지를 취재해서 썼음.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경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