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이른 새벽, 이치카와 중대장이 나카타 반장과 이수를 호출했다. 중대장은 두 사람에게 본부 보급창에 가서 물품을 인수해, 그걸 가잔비라 언덕에 있는 독립고사포 제 27대대 제1중대에 긴급히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나카타 반장은 중대장으로부터 보급품 출고장을 받아 들자마자, 이수의 존재를 무시한 채 앞장서서 부대정문을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갔다. 나카타는 ‘우친사건’이후 어떻게든 이수를 멸시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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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가 오늘 올라가야 하는 가잔비라 고사포진지가 있던 곳. 사진=이파>

그렇게 빠르게 부대 정문을 빠져나온 나카타는 부대를 겨우 50m쯤 벗어나자, 의도적으로 느릿느릿 잰걸음을 걷더니 이수보다 뒤처졌다. 겨우 보급창 앞에 도착했는데도 그는 창구로 가서 보급품 출고신청은 하지 않고, 담벼락에 기댄 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더니, 하늘을 향해 연기만 쏘아 올렸다.

어쩔 수 없어서 이수가 출고장을 건네받아 창구로 가서 보급품을 신청했다. 그러자 창구담당 상병이 이수를 기분 나쁘게 쏘아보았다.

“군부는 보급품을 직접 받을 수 없다는 거 몰라? 가서 담당 하사관 오라고 해”

그제야 이수는 나카타가 노린 게 뭔지를 깨달았다. ‘보급품도 직접 받을 자격이 없는 군부 주제에 감히 하사관과 겨루려 하다니’라는 눈짓으로 나카타는 이수를 한차례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갈지자걸음으로 창구로 가서 보급품을 챙겨왔다. 보급품은 붕대 소독약 등 의료품과 담배 정종 통조림 등 용품이 들어있는 약 15㎏ 정도의 골판지 상자였다.

“이봐 이시타, 나는 총을 메고 있으니까, 네가 보급품을 짊어져”

나카타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이수는 혼자서 보급품을 어깨에 메고 갈 참이었다. 이수는 각반을 풀어서 그걸로 어깨끈을 만들어 단단히 메고, 가잔비라 고사포진지로 향했다. 오늘 보급품을 전달해야 하는 가잔비라 고사포진지는 부대에서 나하 시내를 거쳐 남쪽으로 더 내려가, 메이지다리를 건너 가키하나언덕 위로 올라가야 했다.  그야말로 높은 곳을 향해 쉬지 않고 땀흘리며 올라가야 하는 곳이었다.

이치카와 중대장은 이 보급품을 고사포진지에 전달하고, 정오까지는 부대로 복귀하라고 지시했다. 오전 중에 그 언덕 위까지 가서 보급품을 건네주고 되돌아오려면 시간이 촉박할 뿐 아니라 보급품 상자 안에는 고사포를 설치하다가 다친 공병들을 치료할 의료품이 들어있어서 가능한 한 빨리 물품을 전달해줘야 할 상황이었다.

“나카타 반장, 좀 빨리 갑시다”

아무리 재촉해도 그는 ‘공병들이 다친 게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냐’라는 태도로, 마쓰야마 언덕에 있는 현립병원 앞에 이르자 아예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더니, 또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일본군 중에 저런 저질은 정말 처음 보네...”

<옛 오키나와 현립병원이 있던 자리. 병원은 없어지고 터만 남았다. 사진=이파>

지금까지 이수는 일본군의 엄격성에 기가 짓눌려 있었고,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지는 기합과 훈련에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져있는데 나카타는 참 별종이었다. 책임감도 규율도 없고, 오직 자기 자신의 이익만 열심히 챙기는 희귀종이었다.
이때 하늘에서 새벽공기를 자르는 가녀린 음향이 들렸다. 나카타가 쏘아 올리는 담배 연기 위쪽 검푸른 하늘에 작은 비행기 1대가 나타났다. 그 비행기는 먼동의 태양빛을 받아 마치 ‘샛별’처럼 하얗게 반짝였다. 그 ‘샛별’은 나하 도심을 향해 거침없이 뛰어내렸다. 가위로 자르는 듯 날카롭게 하늘을 두 쪽으로 찢으며 돌진해오는 그 오만함과 하강속도는 위압적이었다.

“으으...또 공습훈련을 할 모양이군, 지겨워...”

나카타 반장이 한손에 담뱃불을 든 채 다른 손으로 하늘을 가리며 이렇게 투덜댔다. 이 비행기의 위압감은 뭔가를 무서운 예시를 던지듯 이수를 압박해왔다. 그 압박감에 짓눌린 채 몇 걸음을 더 옮기는데 그 정찰기에 이어 이어 수없이 전폭기들이 굉음을 일으키며 나하의 공중을 뒤덮어왔다.

“아니, 공습훈련을 하는데 이렇게 많은 비행기가 몰려오다니?”

<10월10일 공습해오는 미군 함재기들.  사진=미국 국립문서관 소장, 나하시역사물물관>
이파(李波)...소설가.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소설은 필자가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도쿄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지에서 취재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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