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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소설] 오키나와(5)...아, 그런 때가 다시 올까?

이수는 어제 저녁 우친을 삼킨 뒤 더 이상 비굴해지지 않기로 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되새겼다. 이제 이치카와 히데오 교수와의 관계를 떳떳이 밝히고, 어떠한 처벌도 받아드리기로 했다.

“이치카와 히데오 교수는 제가 존경하는 선배님입니다”

“그래?…왜 존경하는데?”

“그 선배님처럼 잡초연구에 목숨 걸고 싶어섭니다.”

“잡초연구에 목숨을 건다고?…이봐, 이시타 조장, 이 살벌한 전쟁터에서 잡초가 사람의 목숨이라도 구해줄 수 있다는 거야?”

“네?, 네에…가능합니다. 잡초로 부상병을 지혈할 수도 있고, 말라리아에 걸려 죽어가는 병사를 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어디 두고 보자. 폭탄과 총알이 우박처럼 쏟아지는데도 잡초로 사람을 살리겠다고 계속 우길지…”

“중대장님, 앞으로 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어떠한 위험이라도 무릅쓰겠습니다.”

중대장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서랍 속으로 집어넣은 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온화한 표정을 짓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이수를 한참 바라보았다.

“이시타…사실, 이치카와 히데오는 나의 사촌형이야…그 형이 며칠 전 자네를 빨리 도쿄로 되돌려 보내라고 나한테 편지를 보내왔어…하지만 내가 거절했어…실은 내 능력으로 지금은 자네를 도쿄로 보내줄 수도 없으니까”

“저도 갈 수 없습니다.”

“근데, 제국대학을 다니던 놈이 왜 장교로 가지 않고 군부로 왔어?”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하기보단, 노예로 살고 싶습니다.”

“노예?…그런데, 히데오 형과는 ‘형제의 의’를 맺었다며?”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결국 나와도 형제간인 셈이지?”

“…네에…”

“이시타, 자네 말처럼 나도 지금 노예에 불과해. 그렇지만, 확실한 건 오늘부터 우린 형제란 걸 명심해…”

이치카와 중대장은 이수의 목뒤에 엉킨 핏자국을 닦으라며 자기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이수는 손수건을 받아 쥔 채 중대장실을 걸어 나오면서 ‘떫고 떫은 우친 뿌리 하나가 마침내 나의 운명을 바꿔준 거구나’라는 생각을 하다가, 도쿄로 돌아오라고 편지를 보낸 이치카와 히데오 선배의 얼굴을 떠올렸다.

식물표본실에서 함께 일할 때 두 사람은 주말 마다 1박2일로 도쿄 북쪽에 있는 쓰쿠바산으로 식물조사를 하러 다녔다. 벚꽃이 현란하게 피던 봄날, 그와 함께 쓰쿠바산 아래 벚나무 밑에서 야영을 하며 동이 트도록 ‘풀뿌리’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아, 그런 때가 과연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이수와 히데오가 함께 식물조사를 하던 쓰쿠바산. 사진=이파>

<쓰쿠바산 아래 핀 벚꽃>

쇼와 19년(1944년) 10월 1일 아침, 이수가 조선인 군부 내무반으로 되돌아오자 동료들은 일제히 “와아”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이른 새벽 헌병대에 끌려간 뒤 살아서 돌아온 조선인 군부는 이수가 최초였다.

내무반에서 옆자리인 장윤식이 어느새 재빠르게 붕대를 구해와 권총으로 얻어맞아 피나는 이수 뒷머리의 상처를 싸매주었다. 뒤늦게 달려온 최만순은 기쁨에 못 이겨 이수를 끌어안고 내무반 바닥에 쓰러트리더니 함께 뒹굴었다. 최만순은 그래도 한이 차지 않는지 이수의 배위에 올라타더니, 엉덩이로 이수의 배를 팍팍 누르다가 끝내 이수의 이마위에 눈물을 주룩 쏟았다. 어릴 때 3년간 이수의 집에서 꼴머슴으로 함께 살았던 최만순은 흙탕물에 절여진 그의 군복에 눈물 이랑을 만들었다.

이수보다 네 살 아래인 최만순은 순박한 성품 탓인지 일본군 감독하사인 야마타 반장으로부터 얼마나 혹독하게 구박받고 있는지 동료들도 다 잘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진 이수도 야마타 하사의 횡포를 막아줄 방법을 찾지 못했다. 반(班)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수는 이치카와 중대장이 준 손수건으로 최만순의 눈물자국을 닦아준 뒤 일어서서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껴안았다.

“만순아, 그동안 고생 많았지…우리 꼭 살아서 돌아가자”

“아저씨, 저는 죽어도 괜찮습니다. 저는…아저씨가 어떻게 될까봐…오늘 아저씨가 끌려 나가 어떻게 되면, 목매 죽으려고 했슴다…”

이때 조선인 군부들의 내무반 우두머리격인 서상덕이 이수 앞에 나타나 그 큰손을 내밀었다. 이수가 만순의 어깨를 풀어주며 그의 손을 잡자, 그는 수리처럼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이수의 얼굴을 헤집더니, 별안간 이수에게 풀썩 마루에 엎드려 큰절을 했다.

서상덕은 천천히 일어나 이수에게 다가와서 낮고 굵게 사투리 억양으로 음성을 깔았다.

“형님, 형님은 절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형님을 잘 압니다. 형님, 우쨌거나 우리는 여기서 살아남아가, 조선 땅을 다시 밟아야 할 거 아닙니까. 지금 우리를 그렇게 해줄 사람은 형님밖에 없심다. 형님, 우리 좀 살려주이소”

<이수가 노역하던 103중대는 사진 오른쪽 황색 아파트 뒷편에 있었다. 사진=이파>

이파(李波)...화가 기자 교수 연구소장 사장 등 여러가지 일을 했다.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15년전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꾸준히 오키나와 현지를 취재해서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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