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서 어슬렁<4> - 황금의 꿈이 서린 '지우펀'을 되새기다.

입력 2017-07-28 16:03 수정 2017-07-28 16:03

대만 땅덩이는 작다. 면적이 3만 6천 평방킬로미터이다. 한국이 9만 8천 평방킬로미터로 경상남북도에 제주도를 더한 크기이다. 인구는 2,500만. 이 중 수도 타이뻬이에만 360만 명이 산다. 타이뻬이 위성도시까지 합하면 1천만 명 정도가 수도와 위성도시에 밀집해 있다. 정치, 경제, 외교, 군사, 문화, 교육은 중앙 정부로 집중되어 있다.

대만은 위도 상 동남아 쪽에 속해 있으나 정확히는 동북아시아다. 대만 지형은 우리나라처럼 남북으로, 나뭇잎처럼 길쭉하게 생겼다. 우리나라와 흡사한 점은 또 있다. 한국은 75%가 산악지대다. 대만 역시 75%가 산악지대다. 우리나라의 산악이 동쪽에 치우쳐 있듯 대만도 그렇다. 그래서 동쪽 도시들이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다. 대만은 인구 밀도가 높다.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방글라대시 다음으로 2위에 랭크되어 있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을 요구하며 대만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그러나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은 '당당하고 강한 대만'을 주창하며 이에 맞서고 있다. 대만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다. 사실은 대만이 유엔 회원국이었고 중국이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다. 1949년도에 장개석이 모택동에 패해 대만으로 쫓겨나올 때 유엔가입국은 대만이었다. 유엔 회원국 아닌 중국은 나라가 정리정돈되지 않은 상태였다. 1964년도에 중국은 핵을 개발했다. 이로써 세계에서 다섯번째로 핵보유국이 된 것이다. 핵개발을 완성하면서 강대국으로 우뚝 섰고, 유엔상임이사국이 되었다. 이쯤에서 대만이 유엔을 탈퇴했다. 그때부터 대만은 외교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다.
대만과 국교를 맺은 나라가 중국과 수교하려면 중국은 대만과의 단교를 요구했다. 대한민국 역시 중국의 요구를 받아들인 셈이다. 이런 이유로 지금껏 대만과 수교를 맺은 나라가 몇 안된다.
가장 최근에도 파나마가 중국과 수교하면서 전격적으로 대만과 단교했다. 대만은 충격에 빠졌다. 1912년 중화민국 시절부터 파나마와 수교를 맺고 107년 간 공식관계를 유지해 온 오랜 수교국이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대만의 입장에서 보면 강자의 횡포에 분통 터질 일이나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힘을 키울 수 밖에는.

 

지금도 타이뻬이 시내를 걷다 보면 '대만독립'을 주장하는 문구가 눈에 띈다. 현재는 어떤 나라와도 FTA 체결을 맺은 게 없을만큼 고립된 대만이다. 그러나 세계인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로서의 위상은 높다. 대만 입국 시 이용한 공항이 1청사였는데 2청사가 또 있다. 3청사를 또 짓고 있다. 이처럼 많은 나라 비행기 노선이 속속 들어오고 있다. 대표적 관광지로 세계 4대 박물관 중 하나라는 국립 고궁박물관, 태고적 신비를 느끼게 하는 화련 협곡, 야류 해양국립공원 등 둘러볼만 한 곳이 곳곳에 박혀 있다.

 

차를 타고 옮겨 다니며 본 시내 풍경은 남루해 보였다. 한국의 80년대 쯤 분위기다. 왜 그럴까? 돈이 없어서? 아니다. 한때 한국, 싱가폴, 홍콩, 대만을 일컬어 아시아 네마리 용이라고 했다. 이 네마리 용 중에서 1위가 대만이었다.
1980년대까지만해도 컴퓨터 CPU라든지 하는 전자부품들은 우리가 대만에서 수입해다 썼다. 지금도 역시 완제품 대신 부품 위주로 생산해 전세계로 수출하는 부자 나라다. 대만 역시 우리처럼 지하자원이 없다. 수출해서 먹고 사는 나라다. 그런데 우리와 반대로 완제품을 만들기 보다는 부품 위주로 생산한다. 그래서 중소기업이 굉장히 활성화 되어 있다. 정부 지원도 넉넉하다. 경제적인 면에서 보면 굉장히 평준화가 되어 있다. 우리처럼 모든 게 대기업 위주로 치우쳐 있는 게 아니다. 중소기업으로 골고루 다같이 생산해서 경제발전을 이뤄가는 그런 나라다. 대만에서 하드웨어 적인 것만 보지 말고 소프트웨어 적인 것을 유심히 들여다 보라고 가이드가 귀띔했다. 그러면 정말 서민을 위하는, 국민 편익 위주의 정책이 잘 뿌리 내려져 있다는 걸 느끼게 될 것이라 했다.

한국전쟁 후 폐허에서 시작한 우리와 달리 대만은 금고에 황금이 가득한 부잣집에서 출발했다. 장개석이 중국에서 쫓겨 내려오면서도 잊어먹지 않고 챙겨온 게 있다. 바로 황금이다. 장개석은 전세가 기울어 패색이 짙어갈 때 중국 중앙은행에 있는 황금을 4천톤급 화물선 4척으로 실어 날랐다. 지금도 그 황금을 다 못쓰고 있다. 그 당시 나라 재건을 위해서 쓴 황금은 아마도 1/3 밖에 안될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2/3는 어디에 있을까? 터널 안에 꼭꼭 숨겨 놓았다고 한다. 왜 숨겨 놓았을까? 장개석은 대만에 와서도 대만 경제발전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대만을 군사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했다.

장개석의 소원은 공산당을 반대하며 중국을 다시 수복하는 것이었다. 장개석은 "남겨둔 저 황금은 끝까지 잘 간직하였다가 언젠가 우리가 중국을 되찾을 때 불가피하게 무력적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망가지게 되는데 재건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그때를 위해서 이걸 남겨둔다"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황금의 양은 얼마나 될까? 혹자는 중미 온두라스 정도의 땅을 다 사버릴 정도 양이란다. 대만 도심을 들여다 보면 사는 것이 여유가 있다. 사람들은 아침마다 전통 재래시장으로 달려 간다. 아침에 가면 재래시장이 바글바글하다. 사람 사는 맛이 난다. 한국처럼 대형 마트는 눈씻고 찾아봐도 몇 개 없다. 또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톨게이트는 없고 카메라가 매달린 장치만 보인다. ETC라고 쓰여져 있는 장치다. 우리의 하이패스와 비슷하다. 다르다면 차 자체에 GPS가 박혀 있어 차가 지나가면 ETC란 장치가 반응해 요금을 계산, 집으로 청구서를 날려 보낸다. 7년 전에 톨게이트를 다 없애고 이 장치로 바꿨다. 7년 전부터 출고되는 모든 차량에는 이를 위한 GPS가 다 장착되어 있다. 요금은 은행에서 자동 인출된다. 톨게이트 없는게 교통 흐름을 얼마나 빠르게 하는지 실감할 수 있다.

 

창밖으로 지붕이 노랗고 기둥이 빨간 거대한 건물이 스쳐 지난다. 대만의 랜드마크이기도 한 '원산대반점'이다. 1952년 장개석이 부인 송미령에게 통크게 생일선물로 지어준 초특급 호텔이다. 자금성을 본딴 웅장한 규모이다. 중국 역사상 건물 양식이 가장 아름다웠을 때가 명나라 시절이다. 이 역시 명나라 건축 양식대로 지은 건물이다.
지금도 일본 나라(奈良)나 나고야(名古屋)에 가면 명나라 때 지어 놓은 건축물이 다수 남아 있다. 어떻게 남아 있었을까? 2차 대전 막바지 연합군 폭격이 있을 때 중국의 한 건축학자가 연합군 사령부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눈물 흘려가며 "제발 여기만은 피해 달라, 이게 폭격으로 무너지게 되면 우리 인류조상의 문화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며 간곡히 요청했고 그것이 먹혀들어 비교적 온전히 살아남은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남대문이 불 탈 때 전세계 매스컴이 안타까워 했던 것 역시 같은 맥락일게다.

 


버스는 꼬불꼬불 산모롱이를 돌고 돌아 산꼭대기 마을에 닿았다. 마을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면 '九分', 지우펀(jiufen)으로 읽는다. 아홉 九자에 나눌 '分'자 다. 원래 이 산꼭대기 마을은 아홉 가구가 전부였다.. 아홉 가구뿐이라 슈퍼마켓은 고사하고 생필품 파는 구멍가게 하나 있을 리 없었다. 이 마을 사람들이 뭐하나 사기 위해선 멀고먼 산아래까지 내려와야 했다. 어느 한 집에서 필요한 무엇을 사러 산아래로 내려 갈 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뭐든지 가구수대로 아홉개를 사갖고 올라와 아홉 집이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九分'이다.

 

그런데 어느날부턴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생필품가게와 시장도 들어섰다. 골목도 번화해져 여기저기 홍등이 내걸렸다. 그렇게하여 3만명 인구로 늘어나 조그만 마을은 번화한 소읍으로 번성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만은 일본한테 51년간 식민통치를 받았다. 대만은 어쩌다가 일본 손에 넘어가게 되었을까?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영향력을 펼치기 위해 다투다가 한판 붙게 됐다. 바로 청일전쟁이다. 여기서 청나라가 무릎을 꿇는다. 그 바람에 청나라는 일본한테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일본은 중국의 요동반도를 달라고 했다. 요동반도가 지금의 대련과 심양 쪽이다. 이걸 일본이 차지하게 되면 바로 위 러시아의 부담이 커진다. 일본이 바싹 붙어 오기 때문이다.
독일과 프랑스를 부추겨 요동반도를 일본한테 주지 못하게 압력을 가한다. 결국 일본은 요동반도 접수를 포기하고 또다시 청나라와 조약을 맺는데 바로 시모노세끼조약이다. 그때 중국이 일본한테 떼어준 게 바로 대만이다.

 


일본의 대만 통치는 그렇게 시작됐다. 일본은 치밀하게 대만의 지형과 지질 조사에 들어갔다. 군사지도도 만들기 위해서다. 지질 조사 차 이곳 '구분'마을에 왔다가 운 좋게도 금맥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발견 순간, 좋아 죽을 수밖에. 한창 태평양전쟁이 발발할 때고, 군사자금이 많이 들어갈 때고, 일본 경제상황이 안 좋았을 때였다. 당시 일본은 계속된 전쟁때문에 무지 궁핍했다. 금맥 발견과 동시, 굉장히 빠른 시간 내에 금을 캐내야만 했다.
일본인들은 광부를 대거 모집했다. 인근에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도 벌떼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또 계곡 아래에서 사금을 주으려는 사람들까지 합쳐져 인구가 급속히 늘어났다. 그렇게하여 3만여 명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지우펀(jiufen)이다.
이처럼 급하게 금을 캐려다보니 속도전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보니 걸핏하면 갱이 무너지는 등 사고가 빈발했다. 황금 박물관 초입에는 그때 일하다 희생된 사람들의 '초혼비'라는 비석이 서 있다. 금 캐다 개죽음 당한 사람들을 위한 비다.

 


그 금광 입구에 지금은 황금박물관을 세워 관광객을 맞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금덩이(250kg짜리)를 직접 손으로 만져 보았다. 그림에 떡인 것을...
황금박물관을 나와 지근거리에 있는 지우펀(jiufen) 마을, 골목길로 들어섰다. 대만의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그런 곳이다.  금광 채굴로 번성을 누리던 1920~1930년대는 금을 쫓는 졸부와 광부들로 넘쳐났겠으나 지금 지우펀은 관광객들이 그들 대신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주말 산에 푹 빠져 사는 트레킹 매니아로서 산행 관련 기록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는 山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전문 월간지(3종:월간 봉제기술/배관기술/플랜트기술)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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