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한 일이었다. 몸속에 숨어있던 이수의 자존감이 권총의 총구 앞에서도 전혀 움찔거림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때 이수는 뒤통수가 싸늘해지는 걸 느꼈다. 빈혈처럼 어찔했다. 헌병이 권총으로 이수의 뒤통수를 세차게 때려버린 거였다.

그럼에도 다시 정신을 차린 이수의 의식은 갈수록 더 명료해졌다. 그는 깨진 머리에서 뒷목으로 피가 흥건히 내려와 등골을 적시는데도 통증을 전혀 느끼지 않았고,  흐르는 피를 손으로 닦으려 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목도 타지도 않았으며, 격렬한 분노도 올라오지 않았다. 등 뒤에서 총을 겨누는 그런 협박 따위로는 그를 더 이상 공포로 몰아넣지 못했다. 그는 오키나와의 ‘시사’처럼 눈이 튀어나오도록 헌병을 다시 한 번 노려봤다.

<오키나와에서 마귀를 막아주는 상징물인 '시사'  사진=이파>

이제 몇 시간, 아니 몇 분간을 더 살지도 모르지만, 이 시간만은 자신의 시간이고 싶었다. 삶이 극도로 한시적인 사람만 가질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한껏 누리고 싶었다. 더 이상 조급하지도 않고 허탈하지도 않았다. 그의 정신은 이미 일본 헌병들이 간섭할 수 없는 초월적 영역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수는 벌떡 일어나 옷에 묻은 진흙을 털지도 않은 채 헌병막사를 향해 먼저 걸어 들어갔다. 헌병 막사에 들어서자 따라오던 후임 헌병이 이수의 배낭을 벗겨 급하게 뒤졌다. 그 헌병은 이수가 어제저녁 넣어두었던 풀뿌리 3개를 찾아냈다. 이때 두 헌병의 선임인 하사관 헌병이 문을 열더니 잰 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두 헌병들은 급하게 경례를 붙였고, 그중 한 헌병이 하사관 헌병에게 풀뿌리 3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이놈의 배낭에서 이런 수상한 물건이 나왔습니다.”

뿌리를 받아든 선임헌병은 그 뿌리를 들고 만지다가 냄새를 한참 맡아보더니 익숙하지 않은 냄새 때문인지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곤 이수의 눈앞에 뿌리를 불쑥 드밀었다.

“이봐, 이게 뭐지?”
“풀뿌리입니다”
“뭐? 풀뿌리인건 나도 보면 알아. 왜 이게 네 배낭에 들어있느냔 말이야”
“길옆에 이상한 풀이 있기에 한번 캐봤습니다”

“이놈 이상하네. 전장에서 농작물을 마음대로 취득할 수 없다는 건 알지?”
“네, 압니다. 그러나 이건 농작물이 아니라, 야생입니다”
“야생은 마음대로 캐도 된다는 거야?”

“네, 군사가 배고플 때 야생식물을 취식하는 건 군법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군법이라?...이 놈, 아무래도 수상하네...”

< 판매중인 우친뿌리.. 왼쪽이 이수가 몰래 캔 '아키우친'. 사진=이파>

이때 이수가 속한 특설수상근무 103중대의 이치카와 다케오 중대장이 문을 열고 들어와, 찬찬히 이쪽저쪽을 살펴봤다. 헌병 세 사람이 동시에 경례를 했지만, 그는 손을 절반만 들어 가볍게 경례를 받았다. 선임헌병이 다급하게 이치카와 중대장에게 풀뿌리를 내밀며 상황을 설명했다. 중대장은 풀뿌리를 받아들고 그의 설명을 한참 듣더니, 3명의 헌병들에게 음성을 내려 깔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알았어. 이놈은 내가 처리할 테니, 내게 맡겨”
중대장은 이수 쪽으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따라와”라며 짧게 명령한 뒤 헌병막사를 빠져나갔다. 이수는 이치카와 중대장을 따라 헌병막사를 벗어나다가 문간에 서있는 103중대 나카타 반장과 눈길이 마주쳤다. 이수는 음험함으로 포장된 나카타의 표정을 보고, 이수를 헌병에게 고발한 사람이 나카타란 걸 직감했다.

왜냐하면 어제 저녁 우친 뿌리를 꺼내 만져보고 있을 때, 나카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걸 언뜻 느꼈기 때문. 중대장실에 들어서자 이치카와 중대장은 아까 헌병들의 질문보다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이수의 모든 걸 다  파헤치겠다는 태도로 이수의 눈동자를 한참이나 빤히 들여다보며 질문했다.

“이시타, 이게 왜 네 배낭에서 나온 거지?”
“저는 풀뿌리에 관심이 많아 한번 캐봤습니다”
“이시타, 이건 보통 풀뿌리가 아니라, 우친이잖아”
“네, 그렇습니다.”

“너, 오키나와에서는 우친이 농작물인거 몰라?”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캐지 말았어야지, 농작물을 함부로 캐면 총살이야”
“저는 단지 길 섶에서 야생하는 걸 캤습니다.”
“이봐, 이게 야생이란 걸 증명할 수 있어? 우친은 야생이 없어. 오키나와에선 우친이 전매품이야. 총살당할 놈이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이파(李波)...소설가.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소설은 필자가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도쿄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지에서 취재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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