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소설] 오키나와(2)...우친의 마력

입력 2017-07-26 15:26 수정 2017-08-14 20:37


이수는 우친 뿌리 하나를 왈칵 깨물어 씹었다. ‘아키(秋)우친’이었다. 아키우친은 생강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속살이 더 노랗다. 이수도 다른 군부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오키나와로 끌려오면서 사실상 모든 자존적 삶을 포기해버렸다. 때문에 이 섬에 와서 자신이 자율적인 생명체라고 느낀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우친 뿌리를 입에 넣고 씹는 이 순간, 그의 발바닥 어디에선가 찌릿하고 강렬한 감각이 하나 꿈틀대더니,  그 감각은 다리를 타고 올라오면서 온몸에 숨어있거나 잠자던 여러 감각들을 차례로 일깨웠고, 그 감각은 목구멍까지 타고 올라오더니 결국 감정을 이겨낼 수 없게 만들었다. 이어 그 꿈틀댐은 혓바닥의 감각과 합쳐지면서 머릿속까지 찌릿하게 감전시켰다.

이수는 다시 큰 우친 뿌리 하나를 입에 넣고 우적거리며 씹었다. 우친의 떫고 매운 맛과 그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찡하게 했다. 이수는 오키나와에 와선 냄새를 맡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아예 냄새에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풀뿌리 하나가 죽어있던 그의 후각을 되살렸다.

“아, 이놈 정말, 몹쓸 맛이네”

우친의 마력적으로 매운 기운은 드디어 이수의 눈 속에도 스며들었다. 그러자 지난 3개월간 참고, 참고, 또 참았던 눈물이 황급히 솟아오르더니 흙 묻은 그의 얼굴로 주룩 쏟아졌다.

“아아, 이 우친 뿌리 하나가 나를...”

땀에 절일대로 절인 수건으로 턱밑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낸 이수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부터 이 우친의 맛처럼 자신도 본성을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는 더 이상 비굴, 치욕, 체념 속에 살지 않기로 스스로와 약속했다.

앞으로 며칠을 더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맛을 잃지 않고 맵고 떫고 쓰게 살기로 거듭 다짐한 뒤, 이수는 어깨를 곧추세우고 류큐(琉球)식 기와집 교실인 내무반으로 돌아왔다. 그는 남은 우친 뿌리를 배낭 속에 넣어두고 금방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른 새벽이었다. 갑자기 내무반의 문이 왈칵 열리며 험악하고 강압적인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이수는 어제 저녁 자신의 맛을 잃지 않기로 다짐했던 게 기억났다. 하지만, 이 발자국 울림을 듣자 오늘도 자존적 삶은 또 다시 비열함으로 얼룩질 것 같은 조짐이 왔다.

그 구두 발자국 울림은 일본군 헌병 2명이 빠른 걸음으로 조선인 군부 숙소를 박차고 들어오는 소리였다. 헌병들이 내무반에 밀치고 들어와 갑자기 한곳에 멈춰서면 잠자리에 누워있던 조선인 군부들은 초조함에 견디지 못해 이를 깨물며 숨을 죽였다. 저 발자국 소리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간 군부는 어느 누구도 다시 내무반으로 되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이 왜 잡혀갔는지, 어디로 끌려갔는지, 아무도 몰랐다.

누구는 총살당했다고 하고, 누구는 감옥에 끌려갔다가 병사했다고 한다. 이런 소문 때문에 내무반에서 잠자던 군부들은 이른 새벽 헌병들의 구두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 그저 오늘은 내 차례가 아니길 빌 뿐이었다. 두렵게 내습하던 구두 발자국소리가 오늘은 이수의 머리맡에서 뚝 멈춰 섰다. 감전된 긴장감이 그를 후닥닥 일으켜 세웠다. 일본군 헌병 두 명중 한 명이 고함쳤다.

“이시타 리수(石田 里洙), 모든 군장을 챙겨 밖으로 나와”

이수는 그 고함소리를 듣고 군장을 챙기며 어제 저녁 우친을 먹으며 다짐했던 자존감의 끄나풀을 잡을 수 있게 해주길 빌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을 협박하고 가사상태로 만들었던 그 수많은 굴욕을 이젠 소멸시켜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래, 차라리 잘됐다. 흙탕물에 짓밟힌 이 더러운 치욕과 코피 터지도록 비굴했던 자조도 이제는 마지막이야’

팔다리가 후들거려왔지만, 이수는 차근히 배낭을 챙겨 헌병들을 따라 나섰다. 근데 어제 저녁 우친을 먹은 덕분인지 이수는 자신도 예상치 못할 만큼 침착하고 차분해졌다.

“그래, 살아서 비굴했지만 죽을 땐 당당히 죽자. 나하 항구 진흙 속에서 포탄을 하역하며 닳아 없어진 자존감을 이젠 회복해야 할 때가 왔다.”


<미군포로를 연행하는 일본군헌병. 이수는 이보다 더  험악하게 끌려갔다. 사진=위키피디아>

헌병들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는데 키 크고 건장한 헌병이 이수의 침착한 태도에 기분이 상했는지 헌병은 별안간 이수의 어깨를 콱 잡아 눌렀다. 그때 이수는 헌병의 손을 오른팔로 확 걷어내며 세차게 눈을 흘겼다.그 헌병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수의 어깨를 다시 잡아 짓누르며 이수의 발을 걸어 쓰러트렸다.

이수는 장교막사와 헌병막사 사이의 진흙탕에 내동댕이쳐졌다. 어느새 허리에서 14년식 권총을 빼든 헌병은 이수의 볼에 총구를 대고 짓이겼다.


<일본군의 14년식 권총. 무게 890g으로 묵직하다. 사진=위키피디아>

 
이파(李波)...소설가.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소설은 필자가 15년전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도쿄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 현지를 꾸준히 찾아가 취재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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