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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다큐소설] 오키나와(1)...풀뿌리 같은 운명

오키나와 아메쿠(天久)언덕에서 고사포진지 구축작업을 하고 돌아오다가 서이수(徐里洙)는 길섶에서 파초 잎과 비슷한 손바닥 크기의 풀잎을 발견했다.

“저거, 혹시 우친이 아닐까”

이수는 어깨에 메고 있던 곡괭이로 풀줄기 밑둥치를 단숨에 찍어 파서 뿌리를 뽑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확실히 오키나와 울금인 우친이었다.이수는 도쿄에서 우친 뿌리를 여러 번 봤지만, 살아있는 이파리를 직접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우친은 오키나와에서 생장하는 식물로 일본 본토에선 자라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수의 동료인 조선인 군부들은 모두 오늘 미군 함재기의 폭격 방어를 위한 고사포 진지구축 작업에 너무 지친데다, 허기와 졸음에 못 이겨 허리를 반쯤 굽힌 채 거의 잠속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이라, 이수가 우친 뿌리를 재빨리 캐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어느 누구도 그가 이상한 풀뿌리를 캐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은 덕분에 그는 급히 캐낸 우친 뿌리 5개를 오른손 안에 넣고 뿌리에 붙은 흙을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살살 털어서 군복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는 세키도쿠(積德)고등여학교에 있는 조선인 군부숙소로 돌아와 저녁배식을 받아먹은 뒤, 화장실을 가는 척하면서 밖으로 나왔다.

이수가 소속된 일본군 특설수상근무 103중대는 세키도쿠고등여학교 교실을 내무반으로 쓰고 있었는데, 이곳은 오키나와 나하 항구에서 약 3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미에바시 근처로 부대 바로 앞엔 쿠모지카와(久茂地川)란 냇물이 흘렀다.

 

 <옛 세키도쿠고등여학교. 본관 건물이  군부내무반. 사진= 나하시립박물관>

지난 석 달간 조선에서 이수와 함께 징용으로 끌려온 군부들은 미군의 공격에 대비해 벙커를 파거나 땅굴을 뚫어 거기에 대포와 탄약과 식량을 항구에서 날라다 숨기는 일을 했다.

느닷없이 쏟아지는 소나기 때문에 진흙탕 속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바퀴도 없는 대포를 밧줄로 묶어 고사포진지인 가잔비라의 산꼭대기까지 옮기느라 찢어진 어깨에서 피 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군부들은 어깨를 적시는 피 정도는 감당할 수 있었지만 하루 두 끼밖에 주지 않는, 아무리 씹어 먹어도 끊임없이 설사만 나는, 그 해묵은 현미밥 두어 뭉치만 먹고선 힘을 쓸 수가 없었다.그 지독한 설사에다 말라리아까지 극성을 부려 포탄과 탄약을 나하항의 수송선에서 가잔비라 진지로 옮기는 일을 해온 군부들은 이제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내리쬐는 오키나와의 태양열과 습기 때문에 땀에 절인 군복이 몸에 찰싹 달라붙으면서 온몸을 죄여와 군수품을 옮기는 걸음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일본군 하사는 더디게 걷는 군부에게 귀신처럼 나타나 하필이면 찢어지고 피나는 어깨의 상처자리를 찾아 회초리로 세차게 때렸다.

회초리는 그나마 각성제 역할로 치부할 수 있었지만, 하루 작업량을 다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감독 하사가 곡괭이 자루를 몽둥이로 삼아 엎드려뻗쳐 자세에서 허벅지를 강타해대는 바람에 고통은 더 증대했다. 곡괭이 자루로 얻어맞은 다음날은 모두가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폭탄과 군수품을 옮겨야 했다.

18세에서 20세인 조선인 청년 군부들은 처음 한 달까진 분노에 차서 “왜놈새끼들 어디 두고 보자”라며 이를 악물었지만, 두 달이 지나면서 허기에 지쳐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분노도 차츰 누그러졌다.하지만 군부들을 갈수록 더 고통에 빠지게 하는 건 오키나와의 열기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 열기를 감당해내기에 너무나 힘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저녁엔 구모지가와 너머 나하 항만에서 싱그런 바람이 불어왔다. 이수는 윗도리 주머니에 넣어둔 우친 뿌리 하나를 몰래 꺼내 허리에 차고 있던 수건으로 흙먼지를 털어냈다. 그는 우친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순간 왠지 이 우친 한 뿌리가 자신의 운명을 바꿔놓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풀뿌리 하나가 나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오키나와 우친. 오키나와 나하공설시장에서 산 것. 사진=이파>

이파(李波)...화가 기자 교수 연구소장 사장 등 여러가지 일을 했다.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15년전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꾸준히 오키나와 현지를 취재해서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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