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상 시상식장의 수화

입력 2013-06-01 11:11 수정 2013-06-03 10:09
 '반가워요'를 수화로 하면? 5월 31일 오후 4시께 서울 중구 순화동 호암아트홀 내부는 잠시 술렁거렸다. 2013년 호암상 시상식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사회봉사상 수상자인 이종만 유은복지재단 원장은 수상 소감 이후 '잠시 할 말이 있다'며 마이크를 잡았다. 자그마한 키의 이 원장은 공동수상자인 부인 김현숙씨와 함께 나란히 선 뒤 '두 손을 약간 구부린 뒤 양쪽 가슴께에서 아래 위로 흔들었다.'

 이 원장은 시범을 보인 뒤 사람들에게 한 번 해보라고 권했다. 쑥스러운 듯 마지 못해 따라하는 이들의 모습을 본 그는 "전혀 반갑지 않은 듯하다"며 "수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표정"이라고 말했다. "반가워요"를 나타내자면 손동작도 중요하지만 얼굴 가득 반가운 표정이 드러나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는 이어서 지역에 따라 수화도 다르다고 말했다. 아프리카에선 '반가워요'를 '양쪽 어깨를 아래 위로 흔드는 것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를 따라 어깨를 흔들던 사람들 사이에서 밝은 웃음이 터졌다. 그는 정치권은 물론 다른 곳에서도 사람 사이 소통이 잘 안되면 가끔 그렇게 말 대신 수화로 '반가워요'를 해보라고 말했다.



호암상은 이건희 삼성 회장이 1990년 부친이자 삼성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의 경영철학인 ‘인재 제일주의’를 기리고 인류의 학술과 예술 발전 및 복지 증진에 기여한 이들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제정한 국내 최고의 상이다. 호암은 이병철 회장의 호. 시상 부문은 과학상 공학상 의학상 예술상 사회봉사상 등 5개 부문. 상금만 각 3억원으로 한국의 노벨상이라고 불린다.



올해의 수상자는 황윤성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과학상,물리학), 김상태 미국 퍼듀대 석좌교수(공학상,화학공학), 이세진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의학상), 신경숙 작가(예술상), 이종만/김현숙 부부(사회봉사상) 등 6명이었다.



수상소감은 인상 깊었다. 황윤성 박사는 미국에서 태어났다는데도 썩 괜찮은 한국어를 구사했다. 그는 소감을 통해 자신의 오늘은 부모님이 늘 강조한 두 가지를 가슴에 새긴 덕이라고 말했다. 부모님이 어려서부터 “예술에서 과학까지 다양한 부문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을 존중할 것”과 “어디에 있든 세상을 넓게 보라”고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작가 신경숙씨는 독수리의 습성을 예로 들었다. 독수리의 경우 40년쯤 살고 나면 높은 산 위에 올라가 자신의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내는데 온몸이 벌거숭이가 될 때쯤이면 놀랍게도 새로운 깃털이 나온다는 것이다. 자신 역시 그처럼 스스로의 깃털을 다 뽑고 그 결과 새로운 깃털이 나오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 건 이종만 원장의 소감이었다. 장애인들의 자립을 위해 부부가 자식을 낳지도, 자기집을 따로 마련하지도 않은 채 살아온 이들의 얘기는 그저 내 식구, 내 자식의 안위를 위해 노심초사하며 살아온 내 가슴을 찌르고도 남았다. 부모가 말을 못한다는 이유로 놀림받는 아이, 성폭행을 당하고도 말을 못하고, 공장에서 일하다 사고로 다리를 잘려 고생하다 결국 세상을 떠난 여성 청각장애인의 참혹한 삶을 본 뒤 일생을 그들을 위해 살아가기로 다짐했다는 부부.



가슴을 뭉클하게 한 대목은 그러나 따로 있었다. 이 원장은 봉사니 헌신이니 하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저 함께 살아가는 것이란 얘기다. 그는 덧붙였다. “그들도 세금을 내고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유은복지재단 사람들은 실제 새싹농장을 운영, 거기서 버는 돈으로 세금을 내면서 당당하게 산다고 한다. 들리지 않고 말하지 못하는 그들을 시혜의 대상이 아닌 삶의 동반자로 보는 그 시각과 생각에 결국 눈물이 터지고야 말았다.



모든 걸 세상 탓, 사회 탓으로 돌리고 복지라는 이름 아래 나랏돈이나 독지가들의 후원에 기대려는 이들과 달리 이 원장 부부와 유은복지재단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자립’을 목표로 열심히 일한다. 삶이 얼굴을 만드는 걸까. 농아학교 교사로 시작,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이들의 친구로 살아온 김현숙씨의 얼굴은 해맑기 그지없었다.



문득 그 자리에 참석한 이들의 얼굴을 돌아봤다. 시상식장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인사들이 가득했다. 그분들 모두 어떤 식으로든 우리 사회의 발전에 기여했으리라. 그러나 한국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 유지 발전돼 온 것은 그들보다 이종만 김현숙 부부같은 이들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이 원장은 말했다. "정말이지 말이 안통한다 싶으면 수화로 '반가워요'를 표현해보세요. 한국식도 괜찮고 아프리카식도 괜찮습니다."

봉급 다 받고, 사회적 지위도 한껏 누리는 '갑'으로 살면서 봉사니 헌신이니를 입에 붙이고 사는 ‘높은 분’들은 물론 나와 내 가족의 이익과 안위를 생각하느라 미처 다른 사람들의 삶은 돌아볼 겨를 없는 보통사람 대부분에게 이종만 원장 부부의 삶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어쨌거나 일상에 쫓겨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는 우리 모두 가끔은 낯선 이, 피하고 싶은 사람, 도저히 호흡을 같이 할 수 없을 것같은 이들을 향해 손이나 어깨를 흔들어볼 일이다. 혹시 아는가. 세상이 조금은 따뜻하고 평화로워 질 지. 분노와 원망으로 부글거리던 마음도 가라앉고.


늦깎이 훈장이 된 글쟁이. 내 인생의 꼭지점이 아직 남아 있겠거니 믿으며 매사 열심히 대드는 철 안든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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