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에 산다. 결혼한 뒤 강서구, 구로구, 영등포구, 종로구, 일산을 거쳐 자리잡은 곳이다. 웬 이사를 그렇게 자주? 위장 전입? 국회 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이들 대다수가 위장전입과 다운계약서 작성에 대해 개발시대의 부산물이라며 "그땐 거의 다 그랬다"지만, 어느 것도 못해 봤다.

  법이란 게 지키라고 있는 건 줄 알았던 까닭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맨처음 얻은 전세집에선 6개월만에 주인이 아이를 낳겠다며 나가라고 하는 바람에 쫓겨나다시피 했고, 두번째집에선 중동에 일하러 간 남편 몰래 집을 처분하려는 부인 때문에 전세금을 날릴 뻔하다 겨우 건지고 나왔다.  
 
  2000원짜리 남대문시장 바지로 2년을 버틸 만큼 근검절약해 내집을 장만했지만 강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부동산테크와는 담 쌓은 꼴이다. 일산에서 10년 이상 살다 서울로 돌아와 마포구에 눌러앉은 지 6년. 지하철 5,6호선에 공항철도도 있고, 조만간 경의선도 개통되니 실로 사통팔달이다.

  교통 좋고 아파트 단지도 아늑하지만 간혹 기분이 씁쓸해질 때도 있다. "어디 사느냐"는 물음에 "마포요" 했을 때의 상대방 반응 탓이다. "아, 네에" 하거나  기껏해야 "요즘 많이 좋아졌죠" 하기 일쑤다. 집값이 떨어져 손해본 것보다 더 가슴이 쓰린 순간이다. 

  그래도 괜찮다. 살기엔 그만이니까. 강변을 따라 걸어서 절두산 성지에 들러 어수선한 마음을 추스리고, 마포대교를 건너 여의도 공원으로 나들이를 갈 수도 있다. 경의선 공사 덕분에 집 근처에 걷기 좋은 공원도 생겼고. 서울에서 녹지가 가장 적은 곳이 마포구라는데 조금씩 늘어나는 듯하고, 상암동 덕에 동네 이미지가 개선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일도 있다. 산책 혹은 마트 가는 길에 '공짜 차'를 마실 수 있는 게 그것이다. 공덕동 로터리에 있는 'S-오일' 본사 건물 앞. 길가에 노란색 주유기가 처음 등장한 건 지난해 여름. "이게 왜 여기 있지" 하면서도 무심코 지나치던 어느 날이었다. 

  주유기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길래 무슨 일인가 다가가 보니 주유기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오가는 이들의 갈증 해소를 위해 생수를 제공한다"고 돼 있었다. 이후, 저녁 산책길이나 마트 가는 길에 잠시 서서 시원한 물을 마시는 일은 기쁨이었다. 

  계절이 바뀌고 바람이 스산해지면서 찬 물을 찾지 않던 어느 날, 주유기 앞에서 눈을 크게 떴다. 생수기에서 따끈한 차(茶) 자판기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차의 종류도 다양했다. 커피, 코코아, 녹차, 10가지 곡물을 섞어 만든 10곡차까지. 10곡차는 배 고플 때 먹으면 든든하기까지 하다. 유난히도 춥고 길었던 지난 겨울,노란색 주유기에서 나오는 길거리 공짜차는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여주기에 충분했다.

  S-오일에선 뭔지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들을 위해 바로 옆에 안내판도 세우고, 차를 마신 후 컵을 아무데나 버리지 않도록 주유기 옆에 1회용 컵 수거기도 마련했다. 그냥 '공짜 차를 준다'가 아니라 세심한 배려를 통해 "누구나 마음 편하게 마시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S-오일은 외국계 회사다. 쌍용정유에서 S-오일로 이름이 바뀐 건 2000년.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가 대주주다. 마포구 공덕동에 본사가 들어선 건 2011년 6월. 새 사옥에 입주한 지 1년 만에 지역 주민을 비롯한 일반인들에게 작은 정성을 제공하기 시작한 셈이다.

  물론 마케팅의 일환일 것이다. 오가며 물이나 차를 공짜로 마시다 보면 S-오일에 대한 인지도와 호감도가 높아지고 자연히 고객도 늘어날 것이란 속셈이 깔려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짜 차를 주는 곳은 건물 밖 지하철 역 앞이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닌 지하철 이용객, 걸어서 마트에 가는 사람 모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편히 마실 수 있는 곳이다.
 
  서비스와 소통은 이런 것이다 싶다. 요란스러운 구호나 홍보를 앞세우지 않고, 조용하고 은근하게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 특정한 사람들을 겨냥함으로써 크든 작든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부담을 주는 게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 아무 부담 없이 제공함으로써 그저 느끼게 하는 것. 

  정해진 이들, 이른바 우리편만을 대상으로 하는 소통은 소통이라고 할 수 없다. 기업과 정부, 정치인 모두 마찬가지다. 선험에 따라 대상을 구획짓거나 내편 네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소통의 출발이다. 맞춤 마케팅 너무 좋아하지 말 일이다. 
       

  
      

  

 
늦깎이 훈장이 된 글쟁이. 내 인생의 꼭지점이 아직 남아 있겠거니 믿으며 매사 열심히 대드는 철 안든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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