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국민배우 안성기씨의 한 마디

  매주 목요일이면 방송국에 간다. 과학전문 채널 ‘YTN 사이언스’에서 화요일 저녁 7시 30분에 방송되는 ‘한국의 맛’ 더빙을 위해서다. 지난해 10월에 시작했으니 어느 새 반 년이 넘었다. 무슨 일이나 잘 하고 싶지만 이 일은 특히 더하다. 나이 60에 시작한 새 일인 까닭이다.

  오랫동안 애니메이션 더빙을 해보고 싶었다. 캔디, 하니, 스폰지 밥, 가필드 등등. 어느 것이든 맡기만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같았다. 나이가 들고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일하면서도 ‘언젠간’이란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어쩌다 그런, 남들이 보면 황당하다 여길 생각을? 

 나이보다 어리게 들린다는 얘기를 들었던 목소리와 아이들을 위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속내 때문이었다. 유독 어린 목소리 탓에 불리했던 적도 많았으나 만화영화 더빙엔 장점이 될 수 있겠지 싶었다. 

  지난해 여름 만 31년 6개월을 근무한 신문사를 떠난 뒤부터 방송이나 영화 쪽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조르다시피 했다. ‘정말 해보고 싶어요!” 반응은 매번 비슷했다. “어울릴 것같다”면서도 “무슨 그런 엉뚱한 발상을”이란 게 그것이다. 애니메이션 감독 한 사람은 “학생들 작품 지도할 때 연락하겠다”고 했지만 그뿐이었다. 기다리던 연락은 끝내 오지 않았다.

  어떤 이는 ‘데모 테이프’를 달라고도 했다. “없다”고 했더니 “그런 것도 안만들어 놓고 뭘 하겠다는 거냐”며 우습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실망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쉽게 이뤄질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되면 어쩔 수 없지만 계속 도전해봐야지” 다짐했다.

  간절함 덕분이었을까. 친한 이의 추천이 힘을 발휘한 걸까. 두 가지가 더해졌지 싶다. YTN 사이언스에서 내레이션을 해보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전국 곳곳의 특색 있는 음식을 소개하는 ‘푸드 사이언스’란 프로그램이었다. 망서릴 이유가 없었다. 

  흔쾌히 시작했지만 처음 해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25분짜리 프로그램을 더빙하는데 첫날 걸린 시간은 1시간 30분. 전문 성우는 길어야 40분이면 끝난다고 했다. 담당 PD는 물론 더빙실의 음악담당자에게도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젊디 젊은 PD는 그래도 괜찮다며 용기를 줬다.

  더빙은 목요일. 원고는 수요일 밤 내지 목요일 새벽에 도착했다. 원고를 기다렸다 미리 읽어보고 호흡을 가다듬어 보지만 더빙실에 들어가면 목도 마르고 호흡 조절도 쉽지 않았다. 붙여야 할 때와 끊어가야 할 때가 구분되지 않으면 NG. 발음이 묘하게 어렵게나 이상하게 말이 자꾸 꼬이는 것도 있었다.

  무리인가, 과한 욕심이었나. 계속할 수 있을까. 마음이 무겁던 차에 배우 안성기씨를 만났다. 한국영상자료원 회의 후 가진 점심식사 자리. “어떻게 하면 내레이션을 잘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비법이 어디 있겠느냐며 말을 피하던 대배우는 자꾸만 조르자 자신의 경험을 털어놨다. “아역에서 성인 배우가 된 뒤 목소리에 힘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어쩌면 좋을까 궁리하다 틈만 나면 신문을 큰 소리로 읽었죠. 자꾸 하다 보니 목소리에 힘이 붙었어요.” 

  그는 또 말했다. “지난해 여름인가. 첼리스트 정명화씨로부터 여름음악캠프에서 교향곡 해설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그러겠다고 했는데 막상 날짜가 다가오자 괜히 맡았다 싶었죠. 다른 것도 아니고 교향곡 해설이라니. 밤잠이 안왔어요. 결국 20일을 앞두고 바깥 약속을 줄이고 악보를 펴놓은 채 하루 종일 해설할 교향곡을 들었어요. 1주일을 반복해서 들었더니 어디서 어떤 악기가 연주되는 지 알겠더군요. 해설이 끝난 뒤 참석했던 이가 말하더군요. 첫 악장이 끝난 뒤 안심했다고요.”

  그는 덧붙였다. “이거 못하면 죽는다 싶으면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이렇게도 말했다. “죽는다는 게 세상을 떠나는 것만 뜻하는 건 아니죠. 배우가 배우 노릇을 못하면 죽는 거지요.” 50년 경력 국민 배우의 한 마디는 그대로 가슴에 꽂혔다. “그래, 해봐야지.용기를 내야지.” 배에 힘을 주고 읽어봤더니 훨씬 나아지는 듯했다. 프로그램은 ‘푸드 사이언스’에서 연초 ‘한국의 맛’으로 바뀌었고, 시청률도 올랐다.  내레이션에 대한 시청자 평도 좋아졌다. “자꾸 들으니 정감이 간다”는 쪽으로.

  내레이션은 여전히 어렵다. 말이란 게 한번 꼬이면 계속 꼬이고, 프로그램의 특성 상 다른 음식프로그램처럼 튀지 않으면서도 맛 있는 분위기를 전달해야 하는데 실로 쉽지 않다. 그렇지만 내레이션을 위해 목을 보호하다 보니 지난 겨울 내내 감기 한 번 안 걸렸고, 길 가다 음식 이름만 보이면 중얼거려보고 사전에서 맛에 대한 표현을 찾아보는 습관도 생겼다.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은 이렇게 삶에 대한 의욕을 북돋우고, 자신을 더 잘 관리하게 만든다.

  경력 50년이 넘는 국민 배우도 새로운 일을 하자면 두려움 속에 연습과 훈련을 거듭한다고 한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으랴. 해보리라.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아직 살아있는데. 누가 알랴. 이러다 보면 애니메이션 더빙도 하게 될지. 시사프로그램 MC는 더 좋고.  목표가 뚜렷하면 길이 생긴다.다들 힘 내보시라. 마흔 넘은 배추머리 아줌마로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했던 수전 보일의 말도 떠올리면서. Go for it(도전하세요)!!!!   

    

   

     

늦깎이 훈장이 된 글쟁이. 내 인생의 꼭지점이 아직 남아 있겠거니 믿으며 매사 열심히 대드는 철 안든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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