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유치원에서는 매월 아이가 교실에서 지내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참관 시간을 제공한다. 사진=이재원.



 

지오가 다니는 유치원에서는 매달 부모회라는 것을 연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지내는 모습을 참관하고, 교육과 관련된 강의를 듣는 시간이다. 마치 검찰의 취조실을 엿보는 거울방과 같은 참관실은 몇 년째 편안한 공간은 아니었다.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기 마련일텐데, 아이가 무엇을 하고 노는지, 친구들과 잘 지내는지 관찰하는 게 도리어 내가 취조를 받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을까. "어머 우리 아이는 왜 혼자 있지?" "oo이는 책을 좋아하나봐요." 등 어머니들의 사소한 말들이 평가처럼 여겨져셔였을까.

지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던 것인지, 내가 참관을 하든 아니든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어느 달에는 혼자서 자그마한 유모차 같은 장난감을 혼자 밀며 빙빙 돌기도 했고, 어떤 달에는 친한 친구는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구석에서 책을 펼쳐놓고 딴 세상에 가 있어서 괜시리 마음이 쓰이게도 했다. 어떤 달에는 밝은 얼굴로 여러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어떤 달에는 우주 관찰에 빠져 있기도 했다. 그 모든 장면들은 아이의 일부일 뿐인데도 어쩐지 자꾸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 같아서 때로는 참관이 불편하기도 했던 것 같다.

참관에 무관심한 듯한 아이가 1년 동안 기다리는 참관일이 있다. 연말, 엄마가 거울방이 아니라, 함께 교실에 들어가 같이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달이다. 가을이면 몇월에 엄마가 함께 방에 들어가는지 재촉해 물었고, 손을 잡고 "여기는 수놀이 하는 곳이야" "여기는 역할놀이 하는 곳이야"라며 자신의 생활을 나에게 직접 소개해주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했다.

올해 엄마가 참여하는 참관일은 일정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때문에 굉장히 애를 먹어 일정을 조정해야했다. 연간 계획에 나와있는 일정을 피하여 방송 녹화일을 정했는데, 그게 바로 바뀐 참관일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여러 사람들과 미리 정하는 약속을 전면 조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1년 내내 기다린 아이를 실망시킬 자신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면담 중 선생님께서도 꼭 오셨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겨우 겨우 조정하여 참석한 날, 지오와 나는 취미에 없는 만들기를 해야 했다. 아이의 사진이 들어간 스노우볼을 만드는 미션이었는데, 종이접기 설명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리터러시 능력으로서는 고난도도 그런 고난도가 없었다. 엄마들은 흰색 찰흙을 연두색으로 만들어서 손톱만한 트리를 잘도 만들어냈다. 빨리 끝내버리고 싶던 지오가 재빨리 흰구슬을 열다 바닥에 모두 쏟아버렸고, '착한 엄마' 코스프레를 하며 나는 구슬을 빗자루로 일일이 쓸어담았는데 구슬이 자꾸만 굴러서 사방으로 퍼졌다. 집에서였다면 스노우볼을 만들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구슬을 쏟았다면 물티슈나 진공청소기로 한줌에 쓸어서 구슬을 모두 버렸을 터. 스노우볼 비슷한 흉내만 내고 지오는 나를 데리고 방 안의 이런 저런 영역들을 소개해주고 싶어했지만 시간이 모두 지나가 버렸다.

왜 착한 엄마 코스프레를 했을까. 잠시였지만 후회마저 되었다. 어차피 잘 하지도 못하는 만들기, 지오처럼 진작 포기하고 빨리 해치우고 말 것을, 괜시리 같은 테이블에 앉은 엄마들보다 내가 모자란 엄마 같다고 느꼈던 것일까. 못 만드는 작은 트리를 만들겠다고 버린 시간이 아까웠다. 잠시나마 지오를 미술학원에 보내야 하나? 이런 생각이나 한 나 자신이 싫어졌다. 어떤 상황에도 엄마들과 경쟁심은 갖지 않겠다고 여겼는데, 나 자신조차 속이고 있었던 것일까?

우여곡절 끝에 자리에 앉아 아이들이 엄마에게 행복해하는 순간의 그림을 감상하고 난 뒤, 아이들이 엄마들에게 선물을 줬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수화로 불러 준 것이다. 학예회같은 것은 거의 하지 않는 유치원이어서, 아이들이 이런 공연(?)을 준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수다쟁이 지오조차 나에게 비밀에 부쳤기에 몰랐던 시간.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이상하게도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아이가 말을 못하는 신생아일 때부터 자장가로 불러줬던 그 노래. 너무 많이 불러서 이제 지겹다는 말까지 들었던 그 노래를 내가 되돌려 받고 있었다.  내가 언제나 아이에게 친절하지 않아도, 때로 무섭게 굴어도, 세상을 살면서 온갖 일이 있어도 너는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존재라는 걸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늘 불렀던 노래. 생각해보니 내가 그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살았던 것 같아서일까.

주책맞은 눈물에도 방긋 방긋 웃던 아이는, 간식 시간에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 보았다.
"엄마 눈 속에서 찾는 게 있어. 눈물."
"엄마 아까 울었어. 못 봤어?"
"봤어. 히히."

그래. 엄마가 된다는 건. 아이가 나를 엄마라고 불러줬기 떄문이겠지? 몸과 마음과 사회성이 완벽한 아이를 기를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철철 넘치는 모성애가 본능으로 여겨져서가 아니라, 때로는 실수하고 떄로는 부족해도 그가 나를 '엄마'라고 불러줬기에 내가 그에게로 가서 '엄마'가 되는 것 아닐까. 마치 김춘수의 시 '꽃'처럼.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이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지오가 할머니 휴대전화에서 보낸 문자 메시지와 나의 답글.



 

돌아보니, 올해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수화가 아니었다. 가을 어느날, 할머니의 핸드폰으로 내게 보낸 문자. '엄만 세상에서 가장 큰 보물이야. 알지?'. 나를 치장할 보석이 없어도, 내가 보석이 된다면 반짝반짝 빛날 수 있겠지. 좀 울퉁불퉁한 보석이라도. 그가 나를 보석으로 불러준다면야 나는 그에게로 가서 기꺼이 보석이 되리.
이재원 문화평론가
한양대 실용음악과, 정보사회학과 겸임교수
전 텐아시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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