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전철역. 만원전철에서 기진맥진하며 내린 청년을 여학생이 잡아 세웠다. 울먹이는 여학생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청년은 경찰에 체포됐다. 여학생이 청년에게 남긴 말은 이렇다. “아저씨, 치한이죠?”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의 한 장면.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의 도입부 전개다. 이 영화는 주인공 가네코 텟페이(카세 료 분)가 성추행범 누명을 벗기 위해 벌이는 투쟁에 대한 이야기다. 말이 거창해 투쟁이지 사실은 발버둥이다.

 

이 글은 언급된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초반 경찰은 가네코를 회유하려 든다. 자백 하면 벌금형으로 때울 수 있다는 것이다. 가네코의 변호인조차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네코는 하지 않은 일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지 않은 증거도, 증인도 없었다. 재선임한 여성 변호인조차 가네코를 믿지 않았다. 그래도 가네코는 유죄 선고율이 99%인 재판을 택한다.

 

‘남성도 성범죄의 애꿎은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영화는 얼핏 이런 메시지를 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사법범죄다. 피의사실만으로 유죄를 추정하는 제도와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열 명의 범인을 놓쳐도 죄 없는 한 사람을 벌하지 않는다는 무죄추정의 원칙은 영화 내내 등장하지 않는다.

 
“부디 당신이 심판 받으려는 방법으로 나를 심판해 주시기를.”

 

전창진 전 KGC 인삼공사 감독. 사진, 엑스포츠


 

현실은 영화보다 냉혹하다. 지난해 프로농구는 전창진 당시 KGC 인삼공사 감독의 승부조작 의혹으로 시끄러웠다. 그러다 경찰이 전 감독을 소환하자 농구팬들의 우스갯소리 ‘전토토’는 현실로 닥치는 듯했다. 전 감독은 조사 내내 승부조작을 부인했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경찰서 문턱을 넘는 순간 그는 ‘사설 토토에서 돈을 따기 위해 지도하는 선수들을 이용한 파렴치한 감독’이 되었다.

 

경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은 기각됐다. 전 감독이 불구속 상태로 검찰 송치되며 사건은 장기화 됐다. 한국농구연맹(KBL)은 곧바로 전 감독에 대해 무기한 등록 자격 불허 징계를 내렸다. 영구 퇴출이란 의미다. 검찰은 기소 여부를 판단조차 하지 않았는데 농구계에서 먼저 결론을 내린 셈이다 1년 후 전 감독은 검찰로부터 ‘혐의 없음’이 적힌 불기소이유 통지서를 받았다.

 

전 감독의 승부조작 의혹은 1년 4개월을 돌아 ‘없었던 일’로 끝났다. 하지만 전 감독은 그 사이 모든 것을 잃었다. KBL에서 전 감독에 대한 조치를 재검토 하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농구계에 복귀할 수도 없게 됐다. 맡는 팀마다 우승시키며 명장 반열까지 올랐던 전 감독 또한 “이젠 어떤 일도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 <한겨레>에 따르면 전 감독의 변호를 맡았던 이정원 변호사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날도 많았다. 전 감독이 혼자 있게 놔둘 수 없는 날들 말이다.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강남경찰서에 출석한 박유천.


사진, 한경닷컴 


 

올해 내내 연예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성폭행 스캔들도 경찰과 언론이 합작한 살인미수에 가깝다. 경찰은 죄를 입증하겠다는 자신감만으로 언론에 내용을 흘렸고, 특종에 혈안이 된 언론은 이에 놀아났다. 성폭행범이 될 뻔 했던 이민기, 박유천, 이진욱이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으면서 경찰과 언론이 다소 무안해지긴 했다. 하지만 타격을 입진 않았다. 휘청인 쪽은 오히려 혐의를 벗은 이들이다.

 

이들이 내상을 입는 과정엔 대중도 어리석음[衆愚]으로 거들었다. 특히 연속 피소된 박유천의 경우 팬클럽마저 보이콧을 선언했다. ‘고비 따위는 겪어보지 못했을 듯한’ 정상급 아이돌 스타의 추락을 즐기는 분위기도 비난에 동참했다. 성행위 장소인 화장실을 패러디한 조롱도 난무했다. 그래서 박유천이 혐의를 벗는 과정은 관객을 바보로 만드는 반전영화에 가까웠다. 박유천 사태 직후 마찬가지 혐의로 피소된 이진욱은 경찰 출석 당시 당당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무고는 큰 범죄입니다.” 되새겨 보건대 그의 말은 고소 여성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미소를 짓는 '피의자 이진욱'. 사진, 한경닷컴


 

성폭행 스캔들은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서 활약 중인 강정호까지 덮쳤다. 강정호는 데이트 앱으로 만난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를 받았다. 여성은 강정호가 주는 술을 마신 뒤 정신을 잃었다며 약물 사용이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국내 인터넷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가 강정호로 도배되는 동안 미국에선 낯선 상황이 펼쳐졌다. 강정호가 아무렇지 않게 경기에 출장한 것이다. 그것도 꾸준히. MLB 사무국과 피츠버그 구단은 성폭행 혐의에 대한 사실이 확인되기 전까지 강정호에게 징계를 내리지 않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한국의 경우 선수가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릴 경우 즉시 1군에서 말소 되는 등 어떻게든 경기에서 제외되는 게 관례다.

 

강정호. 사진,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사건이 알려진 직후 닐 헌팅턴 피츠버그 단장은 “우리는 경찰의 조사를 지켜본 뒤 우리의 절차를 밟으면 된다”고 차분하게 말했다. 프랭크 쿠텔리 사장 역시 공식 성명을 통해 “수사 중인 사안인 만큼 어떤 코멘트도 할 수 없다”며 “모든 선수와 스태프에게도 관련 발언을 삼갈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피츠버그 구단의 이 같은 대응 이후 강정호와 관련된 어떤 추측성 이야기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구단은 강정호에 대해 두둔도 비방도 하지 않았다. 강정호도 말을 아꼈다.

 

팬들도 섣부른 판단을 경계했다. 강정호의 안타와 홈런에 야유 대신 환호로 맞이했다. WTAE피츠버그가 강정호의 경기 출장이 타당한지를 물은 온라인투표에선 응답자 1750명의 73%인 1270여명이 ‘문제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미국 언론도 절차를 밟았다. 강정호 사건과 관련된 경찰 보고서 공개를 정식으로 요청했다. 정부 기관이 공식 배포하지 않은 공적 정보 또는 문서의 공개를 요청할 수 있는 정보자유법에 의거한 것이다. 그들은 ‘마와리’를 도는 수습기자가 동냥한 정보나 슬쩍 코멘트를 흘리는 경찰 관계자의 입을 빌리는 대신 규범을 따랐다.

 

강정호의 커리어를 완전히 끝내버릴 듯했던 사건은 이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신고 여성이 경찰 조사에 비협조적 태도로 일관하면서 수사가 난항을 겪었다. 시카고 경찰 대변인은 “피해 여성에게 추가적인 질문을 하고자 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면서 “증언을 뒷받침할 만한 명확한 증거를 찾고 있다”고 밝혔다. 이 글을 작성한 30일까지 경찰이 강정호를 기소하지 않으면서 무혐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박유천을 둘러싼 기자들. 사진, 한경닷컴


 

성폭행 스캔들에 휘말린 연예인들은 모두 출연 예정 프로그램에서 하차 했거나 의문의 자숙 기간을 갖는 중이다. 성폭행 시비가 생길 만큼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낙인이 남았기 때문이다. 대중의 인식에 그들은 ‘어쨌든 섹스는 주구장창 하고 다니는 놈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언제든지 다시 성폭행 시비에 휘말릴 수 있는 잠재적 범죄자로 인식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강정호 역시 신병 처리 결과에 상관없이 평생의 꼬리표가 될 가능성은 다분하다. 심판대에 서는 순간 사실은 진실이 아니다. 인식이 진실이다.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의 결말을 말하자면 가네코는 재판에서 진다. 그리고 깨닫는다. 재판은 진실 밝히는 과정이 아니라 피고인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임의로 판단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렇게 가네코는 유죄가 됐다. 그것이 법원, 그리고 사회의 판단이었다. 유죄가 선고되는 순간 가네코는 이렇게 독백한다. ‘최소한 나는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진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재판에서 심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최소한 나는 판사를 심판할 수 있다. 당신은 실수를 범했다. 나는 결백하니까.’

 

재판을 받는 가네코 텟페이.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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