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구분 하지 말자.

입력 2013-09-30 09:43 수정 2013-09-30 09:43
처음 직장이었던 삼성전자 시절 가장 자주 보던 제일기획의 카운터파트가 인문대 10년 선배였다. 학교 시절 학생운동과도 연루되어 유명했던 선배라 회사를 떠나서 이름은 전설처럼 들었었다. 회사에 들어와 그를 보니 반가웠는데, 그 선배는 너무나도 깍듯하게 클라이언트로, 곧 갑으로 나를 대했다. 호칭은 항상 ‘박 선생님’이었고, 결코 술자리에서까지 말을 놓는 법이 없었다. 제발 술자리에서는 말씀 좀 놓으시라 간청을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아닙니다, 박 선생님.”이었다. 제일기획 입사하여 출근한 당일 아침에 로비에서 그 선배를 우연히 만났다. 그 선배가 반가운 얼굴로 다가와 바로 악수하자 손을 내밀며 던진 말. “너 왔단 소리 들었다, 임마!” 이후 그 선배와 나름 가까이 지내려 했는데, 초기의 갑을관계로 맺어진 것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아, ‘이제 만날 수 있겠구나!’했죠.”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일을 함께 한 적은 꽤 되었지만 둘이서 식사를 함께 하기는 처음인 친구가 말했다.

 

미국 주재에서 돌아와서 클라이언트와 광고회사의 갑을관계로 만났다. 이번에는 내가 을의 신분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명색이 팀장이었고, 그 친구는 갑이긴 했지만 부서의 부서원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갑게 만나거나, 얼굴을 맞대고 토론을 하는 그런 자리는 없었다. 
워낙 능력이 뛰어나고 적극적이어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그 친구는 광고주로서 한국 광고계를 대표할만한 인물로 떠오르고, 임원 자리에도 올랐다. 그와 함께 일하는 광고회사 친구들이 너무나 힘들어 했다. 직접 부딪힐 일은 계속 없었는데, 광고회사를 그만 두기 직전에 서로 카운터파트로 할 일이 생겼다. 다른 친구들의 고충이 충분히 이해가 될 정도로 힘들었다. 오랜 기간 알고 지낸 사이라는 것을 아는 친구들이 나한테 그 친구가 아무리 광고주라도 심하다고 흥분을 할 정도였다. 어쨌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 광고회사를 그만 두고, 잠깐 쉰 연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며 연락을 하자, 축하 인사와 함께 꼭 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통상의 인사말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추석 전에 느닷없이 그 친구가 구체적으로 만날 약속을 정하자며 연락이 와서 추석이 끝난 후로 날자를 잡아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광고회사를 그만 두면서 갑을관계를 떠나게 되니, 일과 상관없이 ‘인간 대 인간’으로 맘 편하게 만날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반가웠다면서 그 친구가 맨 위의 말을 했다. 몇 명 공통의 친구와 함께 보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둘만이 만났는데, 서로 둘만의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어서 결과적으로 더욱 좋았다. 실제로 책에 싣지는 않았지만 처음 책을 내면서 ‘감사의 말’에 첫직장이었던 삼성전자 홍보실 분들을 언급하며 ‘인간적 넉넉함과 업무에서의 철저함이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적었었다. 좀 나쁘게 얘기하면 당시 홍보실의 분위기가 그렇게 널널, 좋게 표현하면 여유가 있었다. 금전 관련한 부정이야 없었지만, 출퇴근 근태를 가지고 그렇게 압박을 느낀 적도 없고, 근무시간 중의 외출이나 반주까지도 자유로운 편이었다. 




나중에 광고회사로 온 후에 조직이 경직되어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물론 처음에만 그랬고 광고회사는 그 나름대로의 여유있는, 자율적인 분위기가 있엇고 거기에 곧 적응이 되었다. 게다가 이태원으로 제일기획이 이사오기 전까지는 계속 본사 이외의 건물에서 근무를 하여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가 강했다. 하루는 오전에 광고주에게 가서 어느 선배가 중요한 발표를 해야 하는데, 아무 연락도 없이 나오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마지막 순간에 부서장이 집으로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그 선배의 집으로 전화를 하니, 선배가 말똥말똥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날 과음으로 쓰러진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게 쑥스러울 지경이었다. 조용히 그 선배가 말했다. “오늘 아침 내가 인생에 있어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네. 미안하지만 회사에 가지를 못하겠어. 고민을 더 하겠네.”해서 “아, 당연히 그러셔야죠. 저희가 잘 처리하고 올게요, 걱정마시고, 고민하셔요.”하고는 위의 상사에게 그대로 보고를 했다. 그 상사도 아무렇지도 않게, “뭐, 심각한 게 있나보다. 어쩔 수 없지”하고는 우리와 함께 작전계획을 새로 세우면서 클라이언트 보고를 위하여 자리를 떴다.
나는 그렇게 갑을관계를 , 또 공사를 철저히 구분하지 못한다. 비리에만 연루되지 않으면 노는 것처럼 일하는 게 바로 공사구분하지 않는 것의 일종이고, 재미있게 열심히 일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특히나 광고회사의 경우 그런 자세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본다. 클라이언트 내부에서는 할 수 없는 생각을 감히 얘기해야 하는 것으로 돈을 받는 부분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의 일이다. 최대 클라이언트의 최고경영자께서는 광고회사에서 발표한 것에 대해 자신이 코멘트를 하면, 광고회사 사람들이 그저 받아적기에만 바쁘다고 생각이 없다며 나무랐다. 어느 날 그 분의 코멘트에 대해서 광고회사 사람이 반론을 제기했다. 반론을 제기한 이가 회사에 돌아왔을 때, 클라이언트로부터 '출입금지'조치가 이미 광고회사 최고경영자에게 전달이 되어 있었다는 전설같은 얘기가 있다. 실제 '출입금지' 조치는 심심치 않게 나오는 일이었다. '공사구분'과 '갑을관계'에 충실한 조치였는지의 여부는 결정하기가 쉽지는 않다. 단지 그런 '출입금지'가 그들의 인간관계에까지 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할 뿐이다. 인간관계에서까지 공사구분 하지는 말자.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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