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규정을 어기고 큰 성과를 얻은 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1951년 2월은 한국전쟁이 단시일 내에 서로 몇 백 키로미터를 밀고 밀리던 지난 8개월 간의 상황에서 몇 십키로미터 이내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진지전의 상황으로 변하던 시점이었다. 주로 낮이면 미군이, 밤이면 중국군이 주도권을 가지고 공세를 취했다. 미군 전력의 핵심은 압도적인 공군력이었다. 전방의 중국군들은 대공포로 대응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있었다. 미국 전투기들은 추락할 염려없이 마음 놓고 중국군의 진지 위를 날아다니며 기총소사를 하거나 폭탄을 퍼부었다.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이 말하지 않았던 것들>(왕수쩡王樹增 지음, 나진희.황선영 옮김. 글항아리 펴냄, 2013)에서는 ‘그들은 중국군 병사들의 머리 위에 바짝 붙어서 날았고, 급강하할 때 비행기 날개가 거의 중국군 병사의 모자를 벗길 수 있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미군의 주력 전투기인 P-51 한 대가 양평에서 추락했다. 
관충구이關崇貴라는 최전방 소대에서 부분대장으로 기관총수를 맡고 있던 병사가 자신의 기관총으로 전투기를 쏘아서 격추시킨 것이었다. 기관총을 맞은 전투기의 날개 한 쪽이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꼬리 부분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치며 산골짜기에 처박혔고, 곧 이어 폭발했다고 한다. 조종사는 낙하산을 펴고 탈출을 시도했는데, 워낙 고도가 낮아서 뾰족한 나뭇가지에 찔려서 즉사했단다. 전투기의 기총소사를 피하여 진지 안에 움크리고 있던 중국군 병사들이 환호를 질렀다. 당연히 최고의 훈장을 탈 영웅적인 행위로 생각되나, 실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중국군은 기관총을 포함한 개인화기로 비행기를 향한 대공사격을 금지하는 규정이 있었다. 개인 화기로 대공사격을 해봤자 성공할 확률이 거의 없고, 괜히 자신의 위치를 노출하여 진지 전체에 더 정확한 폭격을 유도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 규정이 매우 엄격하게 지켜져서 위반했을 경우 아주 혹독한 처벌을 내리곤 했단다. 그래서 관충구이라는 병사가 기관총으로 적기를 겨누며 발사하려고 할 때, 다른 병사들이 말렸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충구이는 “그래 봐야 총살밖에 더 당하겠냐!”고 큰 소리로 외치며 방아쇠를 당겼고, 본인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기관총으로 전투기를 격추했다는 소식이 빠르게 연대에 퍼졌고, 연대에서는 총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명령을 내렸다. 대대본부에서 관충구이가 있던 진지로까지 전령을 보내서 알아보려고 했는데, 아무도 관충구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처벌을 받게 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관충구이가 스스로 나서서 자신이 규율을 어기고 전투기에 기관총을 쏘았음을 밝히고 처벌을 받겠다고 했다. 한국에 파견된 중국군의 총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彭德懷도 관충구이가 전투기를 격추시켰다는 사실과 함께 그의 처벌을 요청하는 보고를 받게 되었다. 펑더화이는 “손에 든 경무기로 적기를 격추시킬수 있다니, 이로써 중국군 병사는 대공 작전에 대한 믿음이 생겼소. 그 병사에게 큰 상을 내려야겠소.”라고 하며, 관충구이에게 ‘1급 전투영웅’의 칭호를 내렸고, 특등공훈으로 기록하라고 했다. 그리고나서 사령부에서는 중국군 각 부대에 개인 화기로 전투기를 격추한 관충구이의 경험을 보급했다. 당사자인 관충구이는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이 군율을 어겼으니까 처벌을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결국 연대의 정치위원이 “어리석은 짓 말게. 계속 고집부렸다가는 정말 처벌할 걸세!”라고 까지 말했다고 하니, 겁도 없지만 어지간히 고지식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조직에서의 행동은 규정에 따라 제한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규정은 합당한 이유에 따라 정해지고, 강제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규정이 만들어진 목적은 잊고, 규정 자체를 지키는 데만 모든 가치가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개인화기로 적기를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규정 역시 위에 본 것처럼 그 확률이나 더 큰 피해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기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미군 조종사가 그런 규정이 있는지 알고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소총으로라도 중국군은 자신에게 발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인지했을 것이다. 그러니 마음 놓고 모자를 벗길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서 공격을 할 수 있었다. 미묘하게 상황이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적기가 몇 미터 이내로 접근했을 경우, 아니면 그렇게 구체적인 거리는 아니더라도 개인화기 사정권내로 진입했을 경우는 개인화기로 공격할 수 있다는 식으로 규정에 예외적인 경우를 두었어야만 한다. 
’90년대 말에 지역, 제품마다 모두 브랜드와 슬로건을 다르게 쓰다시피 했던 삼성의 슬로건과 브랜드를 통일하는 작업은 힘들었다. 너무 강제적이다 싶을 정도로 통일된 새로운 슬로건을 쓰고, 서브브랜드들 다 없애고 삼성 브랜드만을 쓴다는 브랜드 정책을 밀어붙였다. 제품 하나하나의 특성을 알리기보다 삼성이라는 브랜드 자체의 힘을 키우는 게 선결되어야만 한다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정책이었다. 이후 삼성 브랜드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나서, 제품의 특정한 기술이나 특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서브브랜드 형식으로 브랜드를 만들 수 있도록 하자는데 지난한 과정을 겪었다. 규정을 만들기 전까지는 의견을 청취하고 토의하지만, 규정이 정해졌으면 무조건 지켜야지 몇 년 지나서 무슨 소리냐는 것이었다. 일리가 있지만, 당시 브랜드 위상과 시장의 반응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고 오로지 규정을 지키는 데만 가치를 둔 반박이었다. 생각보다 오랜 과정과 시간을 보내고 결국 서브브랜드들이 쓰이기 시작했다. ‘갤럭시’와 같은 것도 그런 유형의 하나이다. 
전투기 격추사건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 중국군의 고지식함, 딱딱한 조직문화이다. 규정은 어겼지만 목적에 맞는 전과를 올린 이런 사건에 예외적으로 처벌하지 말자고 한 사람이 공식 보고통로에서 아무도 없었던 걸까? 그런 것을 입밖에 낼 수도 없이, 오직 규정 준수만이 통하는 조직이었을 게다. 이런 조직문화와 형식은 우리 주위에도 아주 많다. 총사령관인 펑더화이의 관대함과 유연한 모습이 인상적으로 부각된 사건이었다. 이런 경우도 많이 일어난다. 실무자들이 아이디어를 내거나 규정을 넘어선 방도를 취할 수 없게 해놓고는 최고위층이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식이다. 많은 회사에서 자주 일어나는 비슷한 경우가 있다. 인사부서에서 그 해의 인력 증원은 절대 안 된다는 방침을 전달하고, 최고경영자는 수시로 그 해 경영상황의 아려움을 얘기하며 인력 증원 불가 방침을 강조한다. 아주 빼어난 인재가 있는데, 인사담당자에게 예외적으로 선발하고자 얘기를 하나 절대불가의 반응만이 나온다. 우연히 최고경영자가 그 인재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전격적으로 그를 채용한다. “필요한 사람은 뽑으라고 했잖아!”라고 하며 아랫사람을 책망하기도 한다. 새로운 시도, 파격을 용인할 수 있는 분위기나 기업문화 없이 그저 왜 새로운 시도를 하지않냐고 몰아붙이는 기업들이 너무 많다.    
후의 얘기를 덧붙이면 전투기를 기관총으로 격추시킨 관충구이는 바로 직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자신의 분대가 맡고 있던 진지를 홀로 2박3일동안 지켜내는 공훈을 세웠다고 한다. 중국군 2개 대대가 그가 지키던 진지로 올라 갔을 때, 당시 그와 싸우던 영국군 시신에서 가져온 소총 30여정이 그의 옆에 쌓여 있었다고 하니 그 전사로서의 강인함은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을만하다. 그 공훈으로 3단계 특진하여 부분대장에서 바로 부중대장으로 임명되었고, ‘1급 전사 영예훈장’을 받았다. 파격이나 새로운 시도와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은 보다 큰 힘을 이끌어낸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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