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면도에 숨은 코드

아침에 일회용 면도기로 면도를 했다. 지난 6월의 출장길에 대한항공에서 받은 것이다. 그 때 원래 사용하던 면도기의 면도날을 고정시키는 필수 부분이 떨어져나가, 거의 열흘에 걸친 출장 내내 그 일회용 면도기를 썼다. 이후 평소에도 일주에 한 번 정도는 이 면도기를 사용하니 일회용면도기라는 호칭을 넘어선 제품이 되었다.

 

이 면도기는 약간 짙은 주황색이다. 면도를 하다가 손등 밑으로 살짝 빠져 나온 면도기 끝부분을 보고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다. 주황색을 보며 살을 베이어 피가 난 게 아닐까 생각이 일순 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 면도기는 값이 싸서 ‘3중날’, ‘4중날’같은 업체에서 말하는 첨단안전장치가 없어서 그런지 면도할 때마다 조금씩 상처가 난다. 아마 면도를 몇 년 이상 한 남자들이라면 모두 면도하다 베인 적이 있을 게다. 그리고 면도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베일지도 모른단 공포를 지니고 있다고 확신한다. 상처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부주의한 사람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근엄하신 내 할아버지께서도 면도하다 베인 후에 손자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을 하신 적도 있다. 그 얘기는 “할아버지의 미소”란 제목으로 개인 블로그에도 올렸다.(http://blog.naver.com/jaehangpark/40056167572) 술 마신 손자에게 보여주셨던 첫 번째 미소에 이어 면도와 관련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두 번째는 대학 1학년 때의 어느 아침이었다. 무언가를 가지러 방에 들어갔는데 할아버지께서 방에 앉으셔서 유심히 거울을 보면서 얼굴의 이 곳 저 곳을 만지고 계셨다.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시는 둥 마는 둥 계속 시선은 거울에 고정하신 채로 혼잣말처럼 말씀을 하셨다. “늙으니까 피부에 탄력이 없어져서 면도를 하는데 자꾸 벤다.“ 그리고는 ‘허, 참’하는 한숨인지 모르게 짧게 뱉으시며 거울에 비친 내게 어색한 미소를 몇 군데의 상처와 함께 띄우셨다.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뜨셨다.

 

지금도 면도를 할 때면 문득문득, 특히나 살짝 베이기라도 하면 할아버지께서 혼잣말처럼 하신 그 말씀과 미소가 함께 내 앞의 거울을 통하여 되살아 나온다. 면도하다 살을 벨만큼 나이가 들지도 않았는데, 오로지 부주의로 베인 상처를 보면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드물게 미소로 정신 차리라고 훈계를 하시는 듯하다.

 

면도에 관한 첫 인상으로 이발소에서 보는 과일 깎는 칼 길이의 면도칼이 아주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가죽 띠에 칼을 갈려 문지를 때 나는 소리는 그 자체로 소름끼치면서도 뭔가 생각지도 못한 음모가 곧 벌어질 것 같은 기대감을 고양시키는 효과를 자아낸다. 사실은 음모랄 것도 없고, 벌어질 수 있는 가장 큰일이란 게 베여서 상처가 나는 것이다. 이발소에서 면도하다가 그렇게 아주 작은 상처라도 난다면 필요 이상의 호들갑과 사과가 즉각적으로 나오고, 작은 상처에 개의치 않는 남자다움과 관용이 각본처럼 뒤따른다.

 

실제 면도를 시키고 받는 입장은 그리 단순치 않다. <컬러 퍼플> 영화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우피 골드버그가 자신을 학대만 하고 부려먹는 남편인 대니 글로버의 면도를 해주며 살의(殺意)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현관 앞 테라스에서 면도거품을 바르고 느긋하게 흔들의자에 앉은 대니 글로버, 면도칼을 쥔 우피 골드버그의 떨리는 손, 대니 글로버의 목에 드러난 굵은 핏줄, 칼을 높이 올렸다가 멀리서 뛰어오며 만류하는 친구의 소리에 손을 툭 떨어트린 우피 골드버그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어리둥절하면서도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신의 목을 만져보는 대니 글로버. 그 일련의 장면은 한 프레임 한 프레임이 면도칼을 중심으로 팽팽하게 긴장된 상태로 돌아가면서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처음 혼자 면도를 할 때에는 긴장감과 어른이 되었다는 성취감이 함께 한다. 고등학교 때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읽은 면도와 관련한 글이 있다.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국의 사립중학교 학생인 주인공은 면도를 하고 싶은데, 수염이 거의 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아직 면도도 해보지 않았다고 놀림도 당한다. 방학을 맞아 부모와 유람선을 타고 여향을 떠나며 이제 면도를 해야겠다고 얘기를 하나 어머니는 아직 할 필요 없다며 어린 애 취급을 한다. 기분이 상한 주인공을 흥분시키는 일이 유람선에서 벌어졌다. 중학생에게는 신이나 다름없던 윈스턴 처칠이 승객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처칠은 계속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인다. 술에 취해 비틀거려 승무원들의 부축을 받아서 겨우 방에 찾아가고, 시끄럽게 떠들곤 한다. 처칠에 대한 실망이 극에 달했을 때, 주인공은 그의 아버지까지 껴서 처칠과 담소하는 자리에 참석하게 된다. 처칠이 얘기를 하다가 알맞은 단어 하나를 찾지 못해서 “에, 에, 그 뭐이라 할까”하고 머뭇거리는데, 주인공이 나선다. “균형(balance), 아닌가요?” 반가워하며 처칠이 “맞아, 균형”하고 소리를 친 후에 주인공을 보고 얘기한다. “젊은이, 앞으로 항상 면도할 때마다 잊지 말라고. ‘균형이 중요한 거야’.” 유람선 내의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 주인공은 면도거품을 잔뜩 얼굴에 바르고 면도기를 기세등등하게 들고는 말한다. “그래, 균형이 중요한 거야.”

 

면도는 매일 하는 일상 활동이지만, 항상 일정 이상의 긴장감이 배여 있다. 어른의 세계로 들어간 성취와 함께 매일 해야 한다는 의무가 함께 부여된다. 미국인들의 면도에 대한 무의식적인 의미를 <컬처코드> 책에서 본 것 같아서 오전에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으나, 면도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생각나는 것들을 훑다보니 몇 개의 의미가 나오긴 한다. 영어로 하면 ‘routine’, ‘tension’, ‘grown-up’, ‘duty’ 등의 단어들이다. 이런 걸 하나로 잘 묶어서 제대로 방향을 얘기해주는 그런 단어는 없을까? 정성(定性)조사 꺼리로 남겨 두었다가 나중에 한번 해봐야겠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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