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겁주며 비교하라 - 스펙산업

1994년 이래 가장 더웠다는 올해 여름 초입에 여자 대학생을 필자의 회사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부탁을 한 적이 없는 선배 한 분께서 광고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 친구 딸이 있는데, 광고계의 선배로서 만나서 대화를 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그 당사자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취업에 걱정이 많다고 했는데, 당당한 표정의 똘똘해 보이는 친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인사를 했다.

 

세칭 서울의 최고 대학 중의 하나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필자에게는 좀 생소한 국제학부라는 데서 경제학 전공이란다. 어떻게 광고에 관심을 갖고, 광고회사로 취업까지 하려고 생각하게 되었느냐 물었다. 지난 1년간 두 학기 미국의 오리건 주립대학(University of Oregon)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왔다며 얘기를 시작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대략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이어진 그의 말도 예상한 대로였다.

 

미국 서부의 중심인 캘리포니아 주와 캐나다와 접경지역인 미국 서부 해안의 최북단인 워싱턴 주와의 사이에 있는 오리건 주는 빼어난 자연 풍광을 자랑한다. 산악과 해안 지역이 함께 있어서, 등산과 스키와 같은 산악 스포츠와 서핑, 요트 등의 해양 스포츠도 활발한 지역이다. 미국의 많은 주마다 해당 주를 대표하는 기업들이 있다. 오리건 주는 누가 뭐라 해도 나이키의 주이다. 나이키의 창업주라고 할 수 있는 두 인물인 빌 바워맨(Bill Bowerman)과 필 나이트(Phil Knight)가 오리건 주립대학의 육상부에서 처음 만났다. 널리 알려진 대로 바워맨은 오리건 주립대학의 육상부 코치였고 필 나이트는 선수였다. 오리건 육상부 선수들이 나이키의 최초 고객이었다. 오리건 주립대학은 나이키의 신제품 개발을 위한 시험장을 제공했고, 경영활동에 뒷받침이 될 학문적인 성과를 일구는 노력을 해왔다. 성공적인 산학협동의 모델을 줄곧 보여 주었다.

 

오리건 주립대학은 나이키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일찌감치 스포츠마케팅 부문을 일구었다. ‘90년대 중반 필자가 스포츠마케팅 프로그램 기획을 위해 공동 연구를 할 해외의 기관들을 알아봤는데, 학계에서는 오리건 주립대학만이 독립된 학기 프로그램과 학위 과정을 가지고 있었고, 자료도 가장 충실했다. 그 전통과 노력이 계속 이어져 오리건 주립대학 전체를 상징하는 대표 과목으로 스포츠마케팅이 언급된다.

 

필자를 찾아왔던 친구 역시 워낙 유명하다보니 스포츠마케팅 수업을 오리건에 간 첫 학기에 들었다. 흥미가 있어서 다음 학기에도 관련 과목을 들었고, 졸업 후 스포츠마케팅 부문에서 일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스포츠마케팅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업종이나 전문 분야가 있겠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은 모두 현재 광고회사에서 하고 있어서 구체적으로 취업하고 싶은 회사도 결정을 했다. 그런데 광고회사에 가겠다는 다른 친구들과 비교를 했더니, 자신이 해놓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소위 광고회사 취업을 위한 스펙으로 거론되는 광고 관련 회사에서의 인턴, 공모전 수상, 동아리 활동 등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 스펙들을 갖추기 위하여 마지막 한 학기만을 남겨 놓고 있는 상황에서 휴학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 친구에게도 애기했지만 광고회사에 들어오고 싶은 동기로 그만큼 뚜렷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광고를 재밌게 보았고, 만들고 싶다고 생각을 했다는 식의 판에 박힌 얘기들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가슴에 와 닿았다. 스포츠마케팅에 꼭 필요한 영어 실력을 포함한 글로벌 역량도 ‘국제학부’에 ‘교환학생’까지 누구 못지않게 갖추고 있었다. “자네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지려고 그렇게 하지? 아무도 따라오지 못할 블루오션을 만들어놓고는 왜 모두가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는 레드오션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어?”

 

계속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 친구에게 비슷한 얘기를 몇 차례 더 했다. 하도 같은 얘기를 반복해서인지 나중에는 그 친구가 알았다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자신 있는 표정을 지었다. 휴학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다시피 하면서 대화를 끝냈다. 자신감이 생겼다는 말과 함께 인사를 하며 돌아서는 그 친구의 뒷모습은 그렇게 확신에 차보이지는 않았다. 친구들부터 시작하여 함께 취업 대열에 나선 친구들부터, 주위 사람들이 모두 일반적인 스펙을 거론하며 겨우 눌러놓았던 불안감을 다시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마케팅으로 치면 ‘공포’와 ‘비교’를 핵심으로 삼아서 사람들을 유인하는 식이다. ‘인턴 경력 없으면 절대 안 돼’, ‘친구들은 모두 인턴 했다던데’ 식의 얘기들을 한다. 그러면서 자꾸 출발점에서 반 발짝이라도 앞서 나가려 애를 쓴다. 몇 년 전에 만화가 이원복 선생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프로를 보았다. 애들 교육과 관련한 질문에 이 선생은 자신의 자녀들은 미안하지만 모두 조기유학을 시켰다면서 대충 이렇게 얘기했다.

 

한국 학교에서의 경쟁은 어릴 때부터 공정하지 못하다. 100미터 경주를 하는데,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을 조금씩 출발선보다 앞에 놓으려 한다. 처음에는 1~2미터 앞에 두었는데, 모두가 앞 다투어 그렇게 경쟁을 하다 보니 결국 90미터에서 모두 출발하여 10미터를 두고 싸우게 된다. 얼마나 경쟁이 치열하겠는가? 그렇게 출발선을 무시하고 내 자식은 앞서 세워야 하고, 다른 누가 그렇게 하면 내 자식도 불이익을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며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래서 미련 없이 조기유학을 보냈다.

 

조기유학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원복 선생이 지적한 현상이 대부분의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걸 부인하지 못하겠다. 학교 진학뿐만 아니라 같은 현상이 취업하는 데도 나타난다. 이런 ‘공포’와 ‘비교’ 마케팅이 입시, 취업, 자기계발이란 산업을 거대하게 키우고 있다. 교환학생을 다녀온 친구와 대화를 나눈 오후에 화장품 산업 관련한 리뷰를 했다. 화장품에서야말로 ‘공포’와 ‘비교’가 산업 자체를 끌고 가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계속)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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