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영어에 맺힌 한(恨)과 콤플렉스를 풀자

교보문고의 <북모닝CEO>에 실은 <글로비시>(로버트 매크럼 지음, 좋은책들 간)에 대한 서평 겸 추천 졸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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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 대한 한(恨)과 콤플렉스를 풀자 

대홍수라는 심판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며 사람들은 다시 교만해졌다. 그들은 신의 뜻을 거스르며 하늘에까지 닿는 탑을 쌓기 시작했다. 그 탑의 이름을 바벨탑이라고 했다. 자신에게 저항하는 인간들에게, 신은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서로 의사가 통하지 않게 된 인간들은 혼란에 빠져 결국 탑을 건설하는 것을 멈추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이다. 두 달 전쯤에 이 바벨탑 이야기를 패로디한 만화를 보았다. 윗부분까지는 똑같다. 말이 통하지 않게 된 사람들이 혼란과 비탄에 잠겨 있는데 한쪽 구석에서 몇몇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야호, 우리는 영어야! 이제 영어 걱정, 영어 공부 하지 않아도 된다!” 

영어에 한 맺힌 민족 

‘99년에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 주재를 나가게 되었다. 출국하기 전 마지막 주일에 큰애가 다니던 교회 주일학교 유치부 선생님께 작별인사를 했다. 모대학의 교수시라던 주일학교 선생님은 애의 머리도 쓰다듬고 등도 두드려주시며, “넌 이제 영어 정말 잘 하겠구나”, “영어배우고 정말 좋겠다” 등 영어 관련해 격려보다는 부러움 가까운 말씀으로 이별의 시간 거의 내내 일관하셨다. 인사를 마치고 나와 “저 선생님이 왜 그렇게 계속 영어 얘기를 하시지? 당황스럽기까지 하던데”하자, 함께 갔던 처가 대답했다. “이봐요, 한국에는 영어에 한 맺힌 사람들이 많아요. 저 선생님도 대학교수하면서 영어 때문에 뭔가 불이익을 당했거나 콤플렉스 같은 게 있을 거야.”

그렇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영어에 대해 맺힌 ‘한(恨)’이 있고, 한편으로 뿌리 깊은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다. 학교 성적이나 대학 입시를 비롯한 진학 시험은 물론이고, 입사나 진급 시험 등에서도 영어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수십 년을 다녀도 영어 쓸 일이 전혀 없는 회사에서조차 영어회화성적으로 진급자를 선정하곤 한다. 영어 때문에 각종 중요한 시험에서 좌절을 맛본 수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영어에 한이 맺히게 된다. 합격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그런 좋은 성적을 올리기 위하여 들인 터무니없는 시간과 노력의 정도가 영어에 대해 한을 품게 만든다.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는 지나친 겸양과 배려에서 나온다. 미국인을 기준으로 놓고 영어를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자신에 대하여 실망하고, 미국인을 한없이 부러워하고, 무조건적으로 그 발음과 제스츄어를 따라하려 애쓰는 콤플렉스 증상은 지금도 냉전이 계속되고 있는 한반도에서의 미국과 한국의 특수 관계, 그리고 냉전 이후 팍스아메리카나가 공공연히 얘기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계속 중증으로 남아 있다.  

알아야 한이 풀린다 

근래 수년 동안 들어온 신입사원들 대부분이 한자를 보면 질색을 한다. 아무리 쉬운 한자라도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뜻을 알고자 하는 작은 노력조차 하기 싫은 하나의 그림일 따름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대학에 들어오기 이전에 한자급수 시험을 봐서 높은 등급을 딴 친구들이 꽤 있었다. 그들의 말인즉슨 대학입시를 위하여 한자 공부를 했을 뿐이고, 대학에 합격하면서 심한 표현으로 한자는 인생에서 지워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정말 까맣게 잊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어도 대학 입학 이전의 한자와 비슷한 존재일 것 같다. 왜 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억지로 하게 된다. 상황이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맘대로 돌아가는 데서 재미는 고사하고, ‘한’이 생긴다. 영어의 근본적인 원리나 역사를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적인 단어 외우기와 문법 익히기에 몰두하고 있는 상태에서 영어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한 맺힌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다.  

“포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내내 신라나 가야 시대의 대장간을 상상하고 있었다. 포항제철소는 가야의 대장간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변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쇠는 대체 인간에게 무엇이었으며, 무엇이어야 하는가.”

소설가 김훈의 에세이집인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저자가 포항제철소, 곧 포스코를 방문한 얘기에서 나오는 부분이다.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고, 답을 얻기 위한 노력을 했기에 김훈의 글이 힘이 있고, 사람들을 매료시킨다고 생각한다. 광고 일을 할 때도 어떤 제품이나 기업을 맡든지 간에 이런 식의 질문을 던지고 그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김훈이 쇠에 대해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을 영어에 대해서 던지고, 그 답을 제시한다. 영어가 어떻게 태어나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에 이르렀는가, 앞으로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에 대한 나름의 지식이 없이 영어를 잘할 수 없다. 잘하기 전에 친해질 수 없다. 나이나 출신이나 관심 분야와 같은 정보가 전혀 없는 개인과 친해지거나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그 개인을 쫒아 다니면서 말을 걸고 친해지라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일방적인 관계이며 당하는 쪽에 한이 맺힐 수밖에 없다.

모든 한국인들에게 영어 공부를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자신의 강한 의지로 영어를 거부하지 않는 한, 한국사회 전반에서 영어는 피할 수 없는 지나친 필수조건이 되어 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한다. 알아야 즐길 수 있다.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부딪히기만 하면 상처만 입고, 결국 한만 쌓일 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많은 한국인의 가슴에 맺힌 영어에 대한 한을 푸는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영어 콤플렉스여 안녕 

7월에 며칠 상간으로 한국으로 출장을 온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을 연달아 만나는 경우가 생겼다. 잘하지는 못하지만 기본적인 일어와 중국어 회화는 배웠던지라, 일본인에게는 일어로, 중국인에게는 중국어로 인사를 했다. 필자의 중국어와 일어가 신통치 않아서 그랬겠지만 양쪽 다 영어교과서에 나오는 “How do you do? My name is OOO. Glad to meet you.”의 문장들로 응대를 했다. 두 경우 모두 통역이 있기는 했지만, 미처 통역이 따라 붙지 않은 상태에서는 서툴게나마 영어로 대화를 했다. 전혀 뜻이 통하지 않을 경우 중국어나 일어를 쓰고자 했으나 그럴 기회가 없을 정도로 충분하게 의사소통이 되었다. 학교에서 그렇게 열심히 배운 문법은 거의 무시되었고, 쓰인 단어들이란 거의 중학교 1~2학년 수준이었지만 별 불편이 없었다. 우리가 사용한 영어가 바로 이 책의 제목과 같은 ‘글로비시(Globish)’의 일종이었다. 세계(Globe)와 영어(English)의 합성어인 글로비시는 1500개 안팎의 단어를 사용한 짧은 문장으로 소통한다.

이 책에서도 자주 인용되고 있는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트인 토마스 프리드먼의 얘기를 빌리지 않더라도 세계는 평평해지고 있다. 평평해진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로 국가들 간의 장벽이 없어지고, 둘째로 평등한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영국이나 미국 친구들과 얘기할 때 “제 서툰 영어를 이해해 주세요”란 말을 꼭 앞에 붙이는 사람들 많이 보았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상대방은 한국어라고는 한 마디도 못하는데 대체 왜 미안한 것일까? 게다가 미국 애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물건을 팔러 왔다가, 영어로 얘기가 진행되며 영어 못하는 것을 용서해달라는 말까지 들으면서 서로의 위상이 역전되는 모양도 보았다. 이제는 그런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글로벌화되는 세상에서 세계의 공용어로서 우리의 ‘서툰 영어’까지 포함하는 글로비시가 자리를 잡는 큰 흐름을 이 책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자부심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영어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 있게 우리만의 글로비시로 의사를 표현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발걸음을 이 책과 함께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언어, 특히 그 중에서도 영어가 큰 주제이기는 하지만 이 책도 미시사(微視史)의 일종이다. 영어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영국과 미국의 역사와 함께 현재의 세상과 미래를 자연스럽게 조망해보도록 이끄는 것은 이 책의 또 다른 매력 중의 하나이다.

[출처] 영어에 대한 한(恨)과 콤플렉스를 풀자|작성자 박재항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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