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열전등을 발명한 사람은?" 토마스 에디슨을 바로 얘기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2천번의 실패가 아니라, 써서는 안 될 2천가지 방식을 알아냈다'와 같은 감동스런 에디슨의 말까지도 백열전등 발명의 전설을 빛내준다. 그런데 미국의 유명저술가인 빌 브라이슨은 그의 최근 서적인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원제: At Home, A Short History of Private Life>에서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토마스 에디슨에 대해서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속임수나 거짓말을 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고, 여차하면 특허를 훔치거나 언론인에게 뇌물을 주고 호의적인 기사를 얻어냈다’고 한다. 에디슨의 동시대인의 말을 빌리기는 했지만 “양심이 있어야 마땅한 곳이 진공상태인” 인물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래도 ‘진취적이고 근면했으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조직가’라는 평가를 곁들여 균형을 잡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서 ‘조직가’라는 말에 나는 주목했다.

 

브라이슨에 의하면, 조지프 스완이라고 약사 출신으로 아주 빼어난 발명가가 있었는데 스완이 에디슨보다 먼저 백열등을 선보였다고 한다. 에디슨이 빠르게 잡아도 1879년 11월에 백열등의 시범작동에 성공했는데 비하여 조지프 스완은 그보다 최소한 8개월 이상 앞선 1879년 2월에 전기 방면에 상당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백열등을 제대로 구현해 보였다는 것이다. 같은 해에 스완은 자기 집에 전구를 설치했고, 1881년에는 다른 과학자의 집에도 전기배선을 해주었다고 한다.

 

에디슨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에디슨은 어느 한 집이 아니라 J.P. 모건을 비롯한 금융회사들이 밀집한 월스트리트를 포함한 맨하탄 남부의 넓은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고 전구를 설치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래서 1882년 9월 4일에 J.P. 모건의 사무실에서 스위치를 눌러서 그의 계획에 동참한 85개 업체에 설치한 800개 전구를 켜는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이후 몇 개월 사이에 에디슨은 334개 이상의 소형발전소를 전 세계에 설립했고, 13,000개 이상의 전구를 설치하고 전력을 공급했다고 한다. 그가 전구를 설치한 곳을 보면 뉴욕의 중권거래소,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좌, 런던의 하원의사당 식당 등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끌 수 있는 곳이었다. 이에 비하여 브라이슨의 책에 따르면 스완은 전구 생산의 상당 부분을 주택에서 처리하고 있었고, 에디슨이 영국에서까지 특허를 따내는 와중에 그는 특허를 신청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스완은 1878년에 영국에서 특허를 받았고, 이어 에디슨의 맨하탄 행사 이전에 웨스트민스터극장이나 사보이호텔 등의 공공장소의 대형 시설에 전구를 설치하고 공급했다. 가끔 빌 브라이슨의 글에 근거하여 글을 쓸 때는 세부적인 부분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발명가로 알고 있는 사람보다 원래 더 먼저 그 제품을 발명한 사람이 있다는 역사적인 발명품들은 많다. ‘90년대 중반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카피로 유명했던 삼성의 기업광고에서까지 소재로 활용되었던 알렉산더 그래함 벨의 전화가 대표적이다. 빌 브라이슨의 말을 따르면 백열등 전구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런 결과를 가지고 온 것이 바로 ’조직가‘로서의 에디슨의 능력이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의 조직은 바로 새로운 발명품을 쓸 사람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사용자를 늘리는 것이 제품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발명된 제품의 경우 승자를 가리는데, 각 제품의 사용자 숫자가 어떻게 되느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소니의 베타와 마쯔시다의 VHS와의 싸움이었다. 소니는 먼저 시장에 베타라는 제품을 내놓고, 기술적으로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더 많은 기업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VHS를 시장 전반에 확신시키는 데 성공한 마쯔시다에 결국 굴복하고 만다. 바로 외부의 세력과의 연계조직에 에디슨은 뛰어났다. 에디슨의 미국 시장이 식민지를 제외하면 영국보다 규모가 크고, 신제품에 대한 거부감이 작았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의 조직은 바로 언론, 곧 PR의 기획과 조직 능력이었다. 앞서도 빌 브라이슨이 언급했지만 그는 언론을 잘 알았다. 어떻게 다루어야 효과적인지 알고 있었다. 그가 J.P.모건의 사무실에서 스위치를 누르는 장면을 그린 기사를 보지는 못했지만, PR 이벤트로서 얼마나 언론들을 그리고 이어서 그에 따라 대중들을 흥분시켰는지 짐작이 간다. 거의 동시대의 링링브라더스 서커스단의 P.T.바넘 이상으로 언론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던 것처럼 보인다.

 

세 번째로는 내부 임직원의 조직을 얘기할 수 있다. 조지프 스완은 기본적으로 1인 발명가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에디슨은 일찍이 뉴저지 멘로파크에 거의 기업 형태로 그의 연구소를 만들었다. 에디슨은 그의 임직원들에게 어떤 식으로 동기부여를 해야 할지 알았다. 그의 임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 없이는 사실 많은 기업들을 끌어들일 수도 없었고, 그렇게 빨리 확산시키는 것도 불가능했다.
 

지금도 어떤 아이디어를 실현시키는 데 대부분의 경우에 위의 에디슨의 성공요인으로 든 ‘조직’의 능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보통 세 번째인 내부의 힘을 한데 모아서 서로 한 방향으로 노력하는 내부 조직이 우선이고 그에 따라서 외부의 고객을 만들고, 그것을 언론이나 구전을 통하여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역사상에 주인으로 남는다.

 

조시프 스완의 이후 삶에 대해 덧붙이면, 그는 에디슨과도 협력했다. ‘에디스완(Ediswan)'이란 회사를 함께 만들었는데 에디슨에게 대부분의 일을 맡기고 자신은 주로 영국에서만 활동했다. 그 자신이 별로 돈에 대해 큰 욕심이 없었다. 1904년에 귀족 작위를 받았고, 행복하게 1차대전 직전에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떴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찌 보면 훨씬 행복했고, 매력적인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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