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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캐치

내 인생의 캐치(Catch)

 

노먼 메일러(Norman Mailer)는 우리에게 <나자(裸者)와 사자(死者)>(영문 원제는 <The Naked and The Dead>)로 유명한 소설가이다. 그는 저널리스트로서도 상당한 활동을 했다. 소설가로서 이름을 날린 이후 언론사에서 두둑한 원고료를 받으며 글을 썼다. 여타 소설가처럼 가끔 훈수 두는 글만 써대지 않고 직접 자신의 뜻을 펼치겠다고 뉴욕 시장까지 출마하기도 한 독특한 인물이었다. 저널리스트 노먼 메일러의 대표작으로 나는 무하마드 알리(Muhamad Ali)와 죠지 포먼(George Foreman)의 ‘정글의 대결(Rumble in the Jungle)’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당시 자이레의 수도였던 킨샤샤에서 벌어진 대결을 소설과 르포, 기사 형식을 혼합하여 쓴 <The Fight>를 꼽는다.

 

“The Fight”와 “The Catch”

이전에 50년 넘게 복싱 기자 생활을 한 사람의 책에서 알리와 죠 프레이저(Joe Fraizer)의 첫 번째 대결은 별 설명 없이 ‘The Fight’라고만 하면 통했다는 얘기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이후 ’The Fight’는 이번에 내가 읽은 노먼 메일러의 책 제목처럼, 알리와 포먼의 대결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이후 어느 기자는 알리와 죠 프레이저의 마지막 대결이 된 ‘마닐라의 전율(Thriller in Manilla)’에 사용하기도 한다.

 

알리가 공통적으로 나선 세 대결 모두 복싱 역사상에 길이 남을 경기였다. 모두 ‘The Fight’라고 지칭해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첫 번째 죠 프레이저와의 대결을 제외한 자이레와 필리핀에서의 두 경기는 위에서 보이는 것처럼 각운을 맞춘 발음으로 운율을 부여한 이름으로 많이 불리었다. 프로모터인 돈 킹(Don King)이 작명했다고 전해지는 두 경기의 브랜드는, ’Rumble’과 ‘Jungle’의 ’~le’, ‘Thriller’와 ‘manilla’의 ’~la’를 연결시킨 정말 잘 만든 이름이다. 특히 그런 식의 시구(詩句) 만들기를 즐겼던 알리에게 정말 어울린다.

 

노먼 메일러에 대하여 잘 알고 있던 한 미국 친구와 출장을 함께 가서 어떤 경기를 ‘The Fight’로 하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가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The Fight’와 비슷한 경우로 ‘The Catch’라는 것에 대하여 얘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으로 책과 예전 기사에서 본 “The Catch”는 바로 뉴욕 자이언츠의 윌리 메이스(Willie Mays)가 클리블랜드 인디안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그 넓은 폴로그라운드에서 센터 펜스로 달려가면서 공은 보지도 않고 글러브를 뻗어서 잡아냈던 바로 그 장면이었다. 지금도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The Catch’는 바로 그 장면으로 통한다. 그러나 메이저리그의 지존이라고 할 수 있는 뉴욕 양키즈와 아무 연관이 없었던 것이 못내 못마땅했던지 ‘The Catch’의 다른 버전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와의 숙명의 라이벌끼리의 월드시리즈 대결에서 터진 죠 디마지오(Joe Dimaggio)의 홈런을 낚아챈 알 지온프리도(Al Gionfriddo)의 플레이를 ‘The Catch’라고 표현한 글들도 몇 개 보았다. 그 플레이 이후 알 지온프리도를 메이저리그 경기장에서 볼 수 없었다. 알 지온프리도는 그 경기 이후 월드시리즈 경기에 전혀 출전하지 못했고, 월드시리즈 이후는 바로 방출되었고, 그것으로 그의 메이저리그 인생도 마지막이 되었다. 자신의 메이저리그 인생의 마지막을 그렇게 화려하게 장식한 사람도 없다. 오직 그 마지막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집중시켜 빛났던 플레이였다. 누가 뭐라 시비를 해도 알 지온프리도에게는 그것이 바로 ’The Catch’였다.

 

이런 얘기를 뉴욕 친구에게 하니, 그는 1978년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플레이오프의 깜짝 영웅인 버키 덴트(Bucky Dent)의 플레이를 얘기한다. 단 한 게임으로 월드시리즈 진출하는 팀을 가리는 플레이오프에서 2할 4푼대 타율에, 일 년에 너다섯 개의 홈런만을 치던 버키 덴트는 주자 두 명을 둔 상태에서 타석에 나와 보스턴의 그 유명한 그린 몬스터를 넘기는 홈런을 쳐서 영웅이 되었다. 뉴욕 친구의 얘기인즉슨 그 버키 덴트가 홈런 뿐만 아니라, 수비에서도 경기를 결정짓는 플레이를 했단다. 그래서 그것이 그에게는 ‘The Catch’로 남아 있단다. 버키 덴트의 놀라운 수비 플레이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나중에 집에 와서 관련된 책들을 보니 아마도 9회말 나중에 시애틀 마리너스와 뉴욕 양키즈 등 여러 구단의 감독으로 이름을 떨친 당시 양키즈의 2루수였던 루 피니엘라(Lou Piniella)의 도박성 플레이와 그 친구가 착각을 했던 것 같다.

틀린 기억이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The Catch’를 얘기한 후, 그 친구가 나와 함께 출장을 갔던 여자 친구에게 물었다. “What’s your catch of the life?” 남자들의 복싱과 메이저리그 얘기 오가는 것을 무심하게 흘려버리고 있던 여자 친구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뉴욕의 친구가 잘못된 기억을 하고 있었지만, 그 질문이 마음에 들어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정정해주는 것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앞으로 많은 사람에게 그 친구가 했던 질문을 던지고 싶다.

 

“What’s your catch of the life?”

 

야구 얘기로 물어본 것이지만, 인생에서의 ‘Catch’로도 확장하여 얘기할 수 있겠다. 여자 친구에게 물어봤을 때 이미 질문은 스포츠를 넘어섰다. 이렇게 중의적으로 쓸 수 있는 표현들이 나는 좋다. 그럼 내 인생의 ’캐치(Catch)’는 무엇일까?

 

삼국지와 최초의 캐치

 

누가 뭐라 해도 동양사학과를 선택한 것이 내 인생의 첫 번째 캐치이다. 나는 삼국지 키드로 자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74년 처음으로 을유문화사의 여섯 권짜리 <소년삼국지>를 만났다. 여섯 권 전체를 읽고 또 읽었다. 학교 수업시간에 몰래 읽다가 선생님께 들켜서 뺐긴 유일한 경험을 안겨준 책이다. 물론 선생님께서 나중에 독서를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데 수업 시간에는 수업에 충실하라는 격려에 가까운 말씀을 하시며 돌려주셨다. 그런 삼국지 탐독은 중학교 들어가서 정도가 덜해지기는 했지만, 고등학교 시절까지 가끔 생각나는 부분을 찾아서 읽는 걸로 이어졌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초에 어느 대학교의 어느 과로 진학할 것이냐를 써넣으라는데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써넣었다. 선생님께서 ‘서울대학교 인문대 역사계열’로 바꾸어 써 넣으셨다. 동양사학과까지 세(細)분류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우리 고등학교에서는 3학년 초에 썼던 그대로 유일하게 진학했다는 데서 아직도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알량하지만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다.

작년 설 무렵, 중학교 입학을 앞둔 둘째 놈이 사촌형들이 넘겨준 초등학생용 세 권짜리 삼국지를 제법 재미있게 읽고 있었다. 제갈량이 죽은 이후는 어떻게 되었느냐 질문을 해서 보니 그 삼국지는 제갈량이 죽는 것에서 끝맺음을 하고 있었다. 마침 <적벽대전 2>가 개봉하여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가 명절 준비에 바쁜 고부(姑婦)를 남기고 나가서 영화를 보았다. 실제로 내 딴에는 명절준비를 도와준다고 나간 길이었다.

영화를 보고 애들 할아버지께서는 상상이 지나쳐서 너무 장난스럽다고 말씀하셨다. 충분히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구석이 있다. 특히 손권의 동생이 첩자로 조조군 진영에 들어간다든지, 주유와 제갈량이 조조와 얼굴을 맞댄다든지 하는 것은 꼭 그랬어야만 했을까 싶기도 했다. 할아버지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작은 놈은 영화에 나온 장면이나 에피소드의 진위 여부를 계속 묻는다. 그리고 집에 와서 그 알량한 초등학생용 삼국지로 확인을 하려 한다. 그래서 제대로 <삼국지연의> 번역한 것을 사주기로 했다.

 

내가 처음 접했던 을유문화사의 <소년삼국지> 여섯 권짜리를 찾았는데 제대로 찾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어느 헌책방에서 찾았는데, 권희철이란 분이 번역을 했고, 가격이 10만 원 정도 했다. 책의 상태 정도를 확인할 수도 없고 해서, 다른 삼국지연의 번역본을 찾다가 한문학자로 이름 높은 김구용 선생의 번역본을 보게 되었고, 몇몇 부분 확인을 해보니 번역 문체도 괜찮아서 주문을 했다.

 

책은 역시 IT선진국답게 바로 다음날 도착했다. 깔끔하게 잘 나왔고 심심하지 않게 그림도 들어가 있는데, 아이에게는 예스런 번역문체가 생경하고 단어들이 어려운 것 같았다. 중학생도 읽기 힘들 것 같다고 불평처럼 얘기를 한다. 일단 삼국지는 이야기가 확확 전개되는 재미가 최고이므로 어려운 단어들은 그냥 넘어가면서 빠르게 읽어나가는데 주력하라고 했다. 어떤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현재까지의 효과는 다소 실망스럽다.

 

마케팅과 연관하여 푼 삼국지 판본

 

대학에 들어가서 보니 내가 처음 읽은 을유문화사의 소년삼국지가 그래도 삼국지연의를 아주 충실하게 번역한 본이었다. 딴에 한문공부하겠다고 할아버지께서 보셨을 소화(昭和) 16년에 영창서관에서 발행한 <현토 삼국지(懸吐 三國志)>를 대조해 읽으면서 자연스레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을유문화사의 소년삼국지를 수십 번 읽고, 중간중간 월탄삼국지, 이문열 삼국지, 그리고 한참 지난 이후지만 황석영 삼국지를 슬쩍 보았는데 아무래도 내게는 을유문화사의 소년삼국지가 가장 마음에 들어서 그런지, 한국의 나름대로 대문호라는 분들이 써놓은 삼국지들을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그런 개인적인 인연 말고도 인기 작가들의 삼국지를 읽지 않게 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런 이유를 정리하여 마케팅이나 광고 부문에 적용하여 다음과 같이 얘기를 하고 다닌다.

첫째, 원본의 진실성과 일관성이다. 원본 삼국지연의의 저자는 재미있게 독자들에게 얘기하는 데 가장 큰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런데 대문호들은 독자들이 읽을 때의 재미보다는 자신만의 시각을 내세운다든지 지식을 자랑하며 어쨌든 뭔가 변형을 해서 자기 목소리나 펜놀림을 보여 주겠다는 의도가 너무 도드라져 보인다. 제품으로 치면 소비자들이 실제로 어떻게 제품을 쓰고 거기서 어떤 효용을 얻을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목적보다는 자기 기업의 특징을 각인시키는 데 주력하는 본말전도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들째, 최초가 중요하다. 선도자의 법칙이란 얘기를 하듯이 선도자는 시장의 기준을 세워 놓는다. 나는 소년삼국지라는 원본에 충실한 을유문화사의 작품으로 삼국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을 갖고 다른 삼국지 판본들을 비교하여 평점을 매기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문열의 삼국지보다는 차라리 미국에서 샀던 내용면에서 나관중본을 충실하게 번역한 영어로 된 삼국지가 훨씬 더 가치 있게 와 닿는다. ‘오리지날(Original)’이 되어야 한다. 비슷한 제품이라도 나만의 독특한 점을 아주 작은 부분에서라도 발견하여 그것으로 새로운 기준이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공감각적인 특히나 시각적인 요소들이 중요하다. 소년 삼국지의 표지 전면과 후면 안쪽에 실려 있던 주요 등장인물들의 그림은 이제까지 어떤 책에서 본 삼국지 인물들보다 생생하고 각 인물들의 특성과 개성을 담고 있었다. 사실은 내가 그 인물들의 그림을 머리 속에 담고 소년삼국지를 읽으면서 그들의 모습을 문자 속에 투영시켜 완전한 그림을 내 가슴속에 심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림이나 다른 감각 요소를 동원하여 브랜드를 형상화하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삼국지로부터 시작하여 중국 관련한 얘기를 위와 같이 맞건 그르건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광고마케팅 세계에 적용하여 자주 하는 편이다. 학부 다닐 때 제대로 열심히 했으면 더욱 더 풍성하고 의미 있는 사례들을 광고마케팅에 덧붙일 수 있지 않았을까 가끔 생각한다. 그런데 아마 그랬으면 대학원으로 진학했을 확률이 높다. 공부를 못했기에 일찌감치 대학원 진학을 접고 학부 중간에 군대에 가기로 결정을 하면서, 내 인생의 두 번째 캐치가 나왔다. 미국(美國)이 바로 그 캐치였다.

 

미국과 삼성, 그리고 최고의 캐치는?

 

나는 ‘미군에 증원된 한국군(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이란 명칭의 카투사(KATUSA)로 병역의 의무를 마쳤다. 학부 중에 군대를 갔다 와야 되겠다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어렴풋이 하던 중에 한 친구가 카투사로 함께 가자고 꾀는 데 그냥 넘어갔다. 1987년 가을 학기에 학교로 돌아왔는데 문화적 충격이란 표현을 쓸 정도로 낯선 풍경중의 하나가 있었다. 후배들이 과 도서실에서 토플, 생활영어 등의 책을 놓고 ‘영어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군대 가기 전까지 영어 공부를 그렇게 드러내 놓고 한다는 것은 암묵적인 금기사항이었다. 선배들로부터 딱히 이유를 들은 것은 아니지만, 따져 보면 영어는 취업 혹은 다른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먼저 비추어졌던 것 같다. 순수 학문을 하러 대학에 들어온 자 혹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한 몸을 바칠 자로서 드러내 놓고 할 일이 아니라는 고결한 인문학도다운 이유가 앞섰다. 그리고 미국의 군사정권 지원에 대한 비판 초기라는 시기적인 여건과 함께, 본고사 준비까지 했던 세대로서 영어 하나는 자신 있다는 학생들 사이의 전반적인 근거 없는 자존심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던 것 같다.

 

더더욱 놀라웠던 것은 토플 책을 꺼내 놓고 공부하던 후배들이 낯도 제대로 익히기 전에 스스럼없이 카투사를 다녀왔다는 이유로 영어 단어의 뜻이나 문장의 해석 따위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가운데, 우습게도 어렴풋이 ‘그 놈의 카투사를 나옴으로 해서 이제 사람들이 나를 볼 때는 미국이라는 것과 연결시켜서 보겠구나’하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예감이 딱 틀렸다고 단정하기 힘든 그런 행적이 이후에 이어졌다.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바로 미국을 왔다갔다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고, 바로 1년 반 후에는 유학이라고 한 2년을 뉴욕에서 지내게 되었다. 이후 제일기획에서의 10년 이상의 세월을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해외광고 기획에 매달려 지냈고, 미국 주재 생활까지 이어졌다.

 

광고와 마케팅 분야에서 미국에 대한 경도는 매우 심하다. 세계 시장의 1/3 정도를 미국 시장이 차지하는 양적인 측면 이외에 새로운 방식이 개발되고 가장 먼저 적용되는 시장이 미국이었으니 당연한 측면도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소비시장으로 한국의 기업들에게 가장 큰 수출시장이기도 하니 더더욱 중요하다. 두 번째 캐치라고 한 미국과 나의 연관성은, 실제 영어 단어 지식은 상관없이 나에게 토플책을 들이대면서 질문을 했던 후배들처럼, 광고마케팅계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혜택을 받으면서 일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내부의 의지(意志)와 자원이 외부 환경 변화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최고의 무대를 제공해 준 기업이 나의 세 번째 캐치가 되었다. 바로 삼성이다.

 

‘80년대말 최초의 직장으로 그야말로 우연히 들어간 것부터, ’90년대 중반이후 15년간에 걸쳐 삼성의 극적인 성장을 한국과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세계를 무대로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광고마케팅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최고의 행운이었다. ‘미국’이라는 캐치가 있어서 가능했다.

 

삼성에 미국 전문가는 많다. 나는 그들과 다르게 보고 사유하고 얘기할 수 있는 바탕이 있다고 자부했다. 바로‘인간 세상의 근본 원리 및 진리의 발견과 깨달음이라는 인문학의 본연의 목적을 광고쟁이로 있으면서 뒤늦게 깨달’아 틀리나 맞으나 얘기로 꺼낼 수 있는 동양사학과 시절이 있었다. 그런 자부심이 그나마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가, 언제, 어떤 연유로 묻던 내 인생 최고의, 최초의 캐치는 바로 동양사학과이다. 

※ 서울대 동양사학과 동문회보인 <東史회보> 2호에 실은 글입니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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