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바래는 뉴욕 야구의 브랜드




1991년 여름 JFK공항에서 나를 태우고 맨하탄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 파란색 야구장을 가리키면서 친구가 얘기했다. “저기가 바로 뉴욕 메츠의 홈구장인 쉐아(Shea) 스타디움이야. 너에게는 아마 메츠 야구보다는 비틀즈 공연이 먼저 떠오르겠지만 말이야.”




        정말 그랬다. 네 명의 비틀즈 멤버들이 운동장을 가로 질러 무대에 오르던 모습과 결과적으로 마지막 공연이 되어서 더욱 뜨겁게 느껴지는 열기가 스타디움 앞을 지날 때마다 온전히 전해 온다. 게다가 메이저리그 야구라면 뉴욕 양키즈가 내게는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91년은 조금 달랐다.



        당시만 해도 1986년 메츠가 월드시리즈를 제패했던 여운이 남아 있던 시기였다. ‘86년 우승을 할 때 투타의 핵심이었던 드와이트 구든과 대릴 스트로베리가 마약과 섹스 스캔들을 번갈아 일으키며 사고뭉치로 자리 잡은 지 오래 되었지만, 그래도 팬들은 매해 또 한번의 기적을 메츠에 기대하고 있었다. 뉴욕 야구의 맹주 자리는 구단주와 감독의 불협화음 앙상블을 연출하던 뉴욕 양키즈가 아니라 ’80년대의 팀이라고 불리던 뉴욕 메츠가 차지하고 있었다.


        1962년에 감독 자신이 제대로 야구를 하는 친구가 없다고 할 정도로 반어적인 의미에서 날린 ‘굉장한 메츠(Amazing Mets)'란 소리를 들으면서 탄생한 메츠는 브루클린 다저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956년 이전 뉴욕에는 3개 메이저리그 야구팀이 있었다. 다저스와 함께 내셔날리그에 속해 있던 뉴욕자이언츠가 있어, 다저스와 야구 역사에 길이 남는 수 차례의 플레이오프 명승부를 치렀다.


        맨하탄에 ‘폴로 그라운드’란 홈구장을 가지고 있던 뉴욕 자이언츠는 20세기 초반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으며, 아메리칸리그의 뉴욕양키즈가 폴로그라운드를 함께 쓸 수 있도록 배려까지 해주면서 뉴욕 야구의 맏형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양키즈가 베이브 루드를 영입하여 최고 인기 야구팀으로 떠오르며 자이언츠의 인기를 압도하자, 자이언츠는 양키즈가 폴로그라운드를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심통을 부린다. 이에 대응하여 양키즈는 브롱크스에 양키스타디움을 짓게 된다. 뉴욕 자이언츠가 뉴욕 야구의 맏형으로서의 위상을 스스로 내차버린 결정적인 장면이다. 
 

수익성과 함께 충성도를 보아야




        베이브 루드는 폴로그라운드에서 모든 경기를 치른다면 100개 이상의 홈런을 칠 것 같다면서 폴로그라운드를 좋아했다. 그런 베이브 루드가 속한 양키즈를 폴로그라운드에서 쫓아낸 것은 이미 시원한 홈런에 매료되기 시작한 팬들을 내쫓는 것과 같이 받아들여졌다. 자이언츠는 무섭게 치고 올라온 경쟁자만 보느라 야구팬, 즉 고객들의 취향이 변하고 있었던 것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 베이브 루드가 출현하면서 메이저리그 야구는 거칠지만 아기자기한 '인사이드 게임(Inside game)'에서 호쾌한 ‘파워 게임(Power game)'으로 변모했다. 팬들이 원하는 파워 게임의 절정이 자신의 본거지에서 펼쳐지는데, 그것에 훼방을 놓는 존재로 자이언츠는 비추어졌고, 상당수의 팬들은 양키즈를 따라서 브롱크스의 ’베이브 루드가 지은 집(The House Ruth Built)', 양키스타디움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또 하나 뉴욕 자이언츠 팬의 충성도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920년대까지 뉴욕의 3개 팀 중 가장 빛나는 성적을 올렸으나, 자이언츠는 성적에 관계없이 그들을 응원하는 열성팬들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맨하탄의 다양한 구성원들과 구성원들 간의 취약한 연대의식이 그런 결과를 빚은 것으로 생각한다. 브루클린 다저스의 경우 이태리계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이민자들의 커뮤니티가 그대로 다저스 팬클럽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들은 다저스의 성적에 상관없이 열렬한 지지를 보냈고, 자신들만의 한풀이와 같은 열광적인 응원문화를 만들어냈다. 나이 먹은 뉴욕 사람들은 다저스의 홈구장이었던 에벳필드에서의 1957년 마지막 다저스 경기 후 벌어졌던 소동에 대해서 얘기하고, 예전 학교 친구들 얘기하듯이 별명으로 당시 뛰던 선수들 이야기를 한다.

        브루클린 다저스의 왕팬이었으며, 스포츠 기자였던 로저 칸(Roger Kahn)의 <The Boys of Summer>는 왕년의 그 다저스 멤버들을 찾아 나선 여정을 과거의 추억과 현재의 인터뷰를 씨줄날줄로 엮어냈다. 어릴 적에 브루클린에 살았다는 미국 친구에게 그 책 읽은 이야기를 했다. 다저스가 브루클린을 떠난 후에 태어난 친구이지만,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마워했다.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로부터 어릴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떠나버린 다저스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들의 추억을 되살려준 데 대한 감사였다.


        양키즈는 시대 분위기, 곧 트렌드를 맞추어가고 스스로 만들어내면서 넓고 단단한 팬층을 갖게 되었다. 베이브 루드 이전의 프로 야구 선수들은 싸움 잘하고, 술을 퍼마시며,  욕설과 불경스러운 표현을 입에 달고 사는 거친 무뢰한들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베이브 루드가 남녀노소 모든 계층에 어필하는 전국구 스타로 인식되면서, 이후 양키즈는 단순한 야구 스타가 아닌 최고 유명인사로서 스타들을 꾸준히 배출했다. 양키즈 선수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사교계의 최고층에 자신이 끼었다는 증거였다. 맨하탄의 상류층들의 여가 중의 하나로 야구, 특히 뉴욕 양키즈 경기 관람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브롱크스 지역은 어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다양한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고 한다. 미국 합참의장과 국무장관을 지낸 콜린 파월의 자서전, <My American Journey>에서 잘 묘사된 것처럼 유대인과 자메이카를 비롯한 카리브해 출신의 흑인들과 중남미 이민자들이 어울려 살던 곳이었다. 이민자 정착의 역사가 오랜 브루클린과 비교하여 보다 역동적인 이민자들의 열정의 한 조각이 뉴욕 양키즈에 자연스럽게 반영이 되었다.


        1952년 생으로 브롱크스에 살았던 유대인 친구 하나는 지금의 메이저리그 야구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당시 양키스타디움의 풍경을 얘기한다. “친구들과 어울려 양키스타디움에 자주 갔지. 개구멍도 알고 있었고, 거기서 일하는 아저씨들도 몇몇 알았어. 걸려도 아저씨들 일 좀 도와주면 되었어. 방학 때 어머니께 입장료로 돈을 받아가지고 와서는 개구멍으로 입장하고, 대신 아이스크림을 사먹었지. 그래도 돈이 남으면 어머니께 다시 갖다 드렸지. 정말 착하지 않아?” ‘60년대 초반 그 친구는 뉴저지로 이사를 갔단다. 그리고 그 친구가 힘주어 강조한다. 자신이 브롱크스를 떠난 후부터 양키즈도 몰락하기 시작했다고. 어쨌든 그 친구가 떠나기 전까지 양키즈는 돈이 되는 상류층 고객과 내 친구와 같은 지역밀착형의 다수 고객들이 이상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객이 어떻게 구성이 되었는가를 보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단순히 어느 집단이 더 경제성이 높은가를 따지는 이상으로 고객이 우리 브랜드에 해주는 역할을 엄밀하게 보아야 한다. 흔히 ‘80:20’ 파레토법칙이라는 것을 고객을 구분하는데 적용한다. 80%의 매출을 올려주는 20%의 고객들이기는 하지만, 그 비율이 고객들의 충성도를 반영한 것은 아니다. ‘60년대초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양키즈가 깊은 침체기에 들어갔을 때, 가장 비싼 티켓을 구입하던 상류층, 유명인사들이 양키스타디움을 떠났다. 끝까지 양키스타디움을 지킨 사람들은 외야석, 블레처(Bleacher)라고 일컫는 곳에 자리 잡고 있던 팬들이었다. 찰리 쉰이 주연한 영화 <메이저리그>의 외야석에 외롭게 북을 치며 응원하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팬들을 연상해보라.


        수익성에만 기초한 파레토법칙을 보충하기 위하여 고객의 ‘평생가치(Lifetime value)'라는 개념과 계산이 나왔다. 미래의 가치까지도 현재의 금액으로 환산하여 계산하고자 했다. 그러나 매출액 측면에서의 영향력은 작지만, 브랜드를 향한 열정의 엔트로피를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지지고객들의 공헌도를 계산하는 길은 유감스럽게도 요원하다. 아니, 모든 것을 금액으로만 계산해 내야하는 대다수 경영자들의 우선순위에 아예 들어있지 않다.




역사 유산의 핵심은 팬




        JFK공항에서 쉐아 스타디움을 지나서 브롱크스 도로를 타든지, 다리를 건너서 맨하탄 남동쪽을 타고 가든지 모두 양키 스타디움을 못보고 지나칠 수 없다. 무수히 그 앞을 지났지만, 단 한 차례 양키스타디움에 갔었다. 1999년 월드시리즈 4차전이었다. 이미 3승을 거두고 있던 양키즈가 이기면 우승이 확정되는 경기였다. 맨하탄 컬럼비아대학교 주변에 차를 세우고, 지하철을 타고 갔다. 지하철 안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뉴욕 지하철치고는 매우 붐비는 객차 안에서 주먹 쥔 손을 올리며 함께 양키즈 구호를 외치고, 승리를 다짐하는 하이파이브도 했다. 그런데 정작 양키스타디움 역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우리를 포함하여 5~6명에 불과했다. 다른 객차에서 내려 스타디움을 향해 출구로 바삐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과, 미끄러져 플랫폼을 빠져 나가는 지하철 안의 승객들의 인종 구성이 확연히 달랐다. 외야 벨처를 제외하면 거의 가장 싼 좌석이었을텐데, 뒤에 앉은 이태리계로 보이는 애 하나는 경기 내내 ‘그 비싼’ 표를 사서 구경하고 있다고 온갖 군데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 다음 해인 2000년은 양키즈와 메츠, 뉴욕 팀간의 소위 서브웨이시리즈가 열렸다. 양쪽 팬들은 서로를 ‘브루클린 다저스의 찌꺼기(Remnants)', ’야구 속물(Snob)'이라고 서로 조롱했다. 신문에서는 양키즈 응원단에서는 전문직들이 많고, 메츠팬에는 자영업자들이 많다고 했다. 중산층 이하는 양쪽 어느 스타디움이 되었건 낄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올해 두 팀 모두 홈구장을 새로 지어 옮겼다. 메츠는 구장 이름마저 ‘시티필드(Citi Field)'로 바꾸었다. 다저스와 자이언츠가 떠난 뉴욕에 내셔날리그 야구팀을 만들기 위해 앞장 선 변호사 ’쉐아(William Shea)'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길 수 없다. 두 팀 모두 새로운 구장에서의 홈 개막전을 패했다. 개막전 패배를 알리는 뉴욕타임즈 기사에서 이런 구절이 눈에 띄었다. “양키즈의 역사적 유산의 상당 부분이 날아갔다. 이제 양키즈는 다른 경쟁자들과 같은 수준이 되어버렸다(Part of the Yankees' legacy is now gone and the franchise is now on a level playing field with the competition.).”


        역사적 유산이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그 유산을 머리와 가슴에 담고 있는 팬들을 스타디움으로 불러들일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 입장권 가격이 2천5백$이라고 자랑하지 말고.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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