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지난 10년을 정의하다

 2009년 제일기획 사보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Between the Economic Crises

– 지난 10여년을 정의하다 –


      ‘Between the Wars’라는 표현을 가끔 영어책에서 보았다. 보통 1919년에 끝난 제 1차 세계대전과 1939년에 발발한 제 2차 세계대전의 사이인 1920, 1930년대를 일컫는다. 우리말로는 그 중간쯤인 1929년말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었다고 하여 ‘대공황 전후’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The World Economy between the World Wars>(2008) 같은 책을 한국에서 <대공황 전후의 세계경제>로 번역하여 출간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죠지타운대학교(Georgetown University)의 데릭 촐레(Derek Chollet)와 제임스 골드가이어(James Goldgeier)는 거의 같은 식으로 <America Between the Wars>(2008)라는 책에서 1989년 11월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까지 냉전(Cold war)의 시기와 소위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ism)’이 시작되는 2001년의 9/11의 사이를 그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앞의 ‘80년대말까지의 냉전은 분명히 전쟁이기는 하지만, 앞의 전쟁들과 비교하여 너무 오래 되어서, 양차의 세계대전 사이처럼 바로 와 닿지는 않는다. 그래도 ’90년대라는 한 시기를 부르는 좋은 용어라는 생각은 든다. 그들이 책에서 주장했던 시각과 의견 자체도 뜨겁지는 않지만,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드는 측면이 많다.

 
     위의 ‘Between the wars’란 표현을 쓴 두 책을 보면 전쟁들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앞선 전쟁의 영향에 따른 결과이자 다음 전쟁의 원인으로 작동한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1차대전 이후 열강들 간의 구체제적 질서에 기반을 둔 세계질서의 재편, 식민제국의 민족적 자각, 단일 국가가 조정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경제체제와 그에 따른 경기 변동 등이 결국은 2차대전의 전주곡으로 작용했다.

 
       그런 사건이나 현상들 간의 일련의 연관관계를 파악하고 규정하면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예측의 힘을 갖게 되고 특정한 현상에 대해서는 경계경보를 발령하게 된다. 대학 시절의 스승이신 민두기 선생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그대로 적용이 된다.


흔히들 역사를 배워 뭣하느냐고 한다. 미래를 내다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역사학자가 뭐 하나 앞일을 예견해 낸 일이 있느냐고 따진다. 그렇다. 역사학자는 점장이처럼 예견해 내지는 못한다…..역사학의 실용성은 눈앞의 어떤 효용에 공헌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이러한 경고능력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민두기 저, <누가 勝者인가>(지식산업사, 1985), ‘歷史學의 實用性’ 중에서


      사실 민선생님의 위의 말씀은 트렌드에 대한 강의 자리에서 새로이 등장할 트렌드를 예측해 달라는 질문을 받을 때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한 변명으로 주로 썼다. 트렌드에 관하여 마케팅 전문가들이 하는 일은 네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어떤 트렌드가 나타나 있는지 ‘포착’하고, ‘정리’하며, 어떤 트렌드가 올 것인지 ‘예측’하고, 새로운 트렌드를 직접 ‘창출’하려 노력한다. 


      시간적으로 보았을 때 ‘포착’과 ‘정리’는 현재완료형, ‘예측’과 ‘창출’은 미래형의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과거와 현재가 없이 미래만이 존재할 수가 없다. 과거와 현재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미래가 존재할 수 있듯이, 포착되고 정리된 트렌드가 있기에 다가 올 트렌드를 예측할 수 있고, 창출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광고회사나 기업체의 마케팅 종사자들을 포함한 대부분 트렌드 연구자들의 미래의 트렌드를 예측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시대를, 소비자의 움직임을 읽지 않으면 결코 설득력있는 메시지를 만들어 내고 전달할 수 없다는 경고를 자신에게 계속 각인시키고, 그렇게 노력하고 있음을 주지시키는 시도의 일환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노력의 초점을 잘 잡아낸 구절이 있어 소개한다.


미래는 현재에도 있다. 단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미래 예측이나 트렌드 분석의 목표이다. 즉 이미 존재하고 있거나 내일을 발생하게 만드는 문화를 읽는 일이다. 또한 그것은 예측을 직관이 아닌 과학으로 만드는 도구, 기술, 기법을 이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래를 억지로 도박해야 하는 대상이 아닌 의지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마틴 레이먼드 저, <미래의 소비자들> 머리말 중에서, 에코비즈, 2006


우리가 지난 10년을 돌아본 이유


      2008년 8월에 광고주 한 분이 전화를 했다.

        “예전 IMF 직후에 브랜드마케팅연구소(현 제일커뮤니케이션연구소)에서 불황기에는 마케팅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세미나를 주최한 적이 있죠? 그 보고서 얻을 수 없을까요?”


        대단한 기억력을 지니셨다고 칭찬을 해 드렸다. 1998년 2월, IMF의 충격기를 지나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현실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 것인가를 모색할 시점에 불황기를 극복하는 마케팅에 관한 세미나를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용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연이어 몇몇 곳에서 10년 전의 그 자료를 찾는 전화가 이어졌다. 그리고 달러나 엔화 대비 원화의 가치나 주가가 곤두박질을 치고, 경기가 본격적인 물황으로 돌입한다는 기사들이 지면에 줄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7년 11월의 어느 날, IMF 체제로의 편입이 공식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당시 유럽 모국에 주재하고 있던 한 주재원이 전화를 해서 울부짖다시피 했다. “우리나라 왜 이렇게 된 거야? 왜 그랬어?!” 해외시장에서의 브랜드마케팅 일을 맡은 자로서 일말 추호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으나, 그 울부짖음 앞에서는 “제가 그러지 않았어요”하며 발뺌(?)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거의 비슷한 전화를 작년 11월에 비슷한 국가에 나가 있는 주재원에게서 또 받았다. 거의 같은 말로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이 왜 닥쳤는지 물은 그 주재원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예전에 그렇게 당해놓고 왜 또 이러는 거야?”


      우리가 충분히 당했는지 여부는 쉽게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때의 교훈을 제대로 되새겨 교육자산으로 만들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1998년에 세미나를 했던 자료를 나 자신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변명조로 그런 자산으로 정리하여 대비하기에는 우리 사회의 변화가 너무 급격했다고들 얘기했다. 디지털 시대는 속도전이라면서 우리는 ‘숨 가쁜 변화’라는 말을 습관처럼 입에 되뇌었고, ‘나노(nano)’가 일상용어가 되다시피 한 자랑스러운 ‘IT 강국 대한민국’을 외쳤다.


        1970년대에 외쳤던 ‘대한민국의 1년은 세계의 10년’이라는 말이 부활하여 쓰이기도 했다. 그를 바탕으로 ‘Dynamic Korea’란 국가 슬로건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정말 우리의 생활과 그에 따른 라이프스타일과 의식까지도 실제로 그런 심한 변화를 겪었을까?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과 의식의 변화의 정도를 추적하겠다는 시도는 몇 군데 기관에서 있었다. 그러나 숨 가쁘게 변했다는 대한민국에 묻어서 변화 자체만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뽑거나 그려 보았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경제 위기를 결정적인 시기로 잡고 그 의미를 파헤치거나 한국인들의 변화를 그에 맞추어 의미를 검증하는 부분은 지극히 부족했다. 다행히 우리는 우리의 그런 지적 욕구를 시험하고 충족시킬만한 1차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IMF 이후에도 브랜드마케팅연구소, 현재의 커뮤니케이션연구소에서는 매년 우리 사회와 소비자들의 변화를 파악하는  ACR(Annual Consumer Research), 한글로는 <대한민국 소비자 라이프스타일 조사>라는 것을 매년 실시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마케팅 활동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세대간의 차이에 중점을 두었고, 한 해 한해 변화된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변화된 측면만이 크게 부각이 되었다. 그리고 연속선상에서의 변화의 파악보다는 매해 보고서를 내놓다 보니까 해당년도에 두드러진 변화 쪽으로 더욱 미시적인 부분만이 부각된 측면도 있었다.


      물론 특정 년도끼리의 조사 결과를 비교한 적은 있었다. 2003년의 경우 1997-2000-
2003의 3개년, 2007년은 1998-2003-2007년의 결과들을 비교하였다.

 
       2003년에 고른 3개년은 어느 정도 경제가 정상을 찾았고, 2002년의 항일월드컵을 통하여 자신감도 회복한 것으로 가정하고 IMF 이전인 ’97년과 비슷한 양상으로 한국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이나 의식이 돌아갔는가 정도를 보는 것과 함께, ‘P세대’라고 명명하였던 참여하는 세대가 몰고 온 변화 등을 비교하며 체크해보고자 함이었다.


        2007년의 경우는 이번 경우와 비슷한 문제의식도 있었지만, 산술적인 10년에 더 무게가 가 있었다. 무엇보다 간격을 둔 특정한 몇 년간의 비교를 통하여 흐름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특정 기간에 대한 상징과 의미의 부여


      역사학 입문 과정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 중의 하나가 ‘시대구분론’이다. ‘시대구분’ 자체가 역사가의 인식을 보여 주는 결과물의 정수이기도 하다. 특정한 기간 동안을 연구한다고 할 때 그 시기를 선정한 이유가 있어야 하며, 그 시기를 어떤 식으로건 정의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민두기 선생의 설명을 빌리면 ‘시대구분은 역사발전의 단계를 구획지음으로써 역사발전의 체계적 인식을 갖기 위한 설명기준’이고 ‘시대를 구분한다는 것은 역사를 보는 시각을 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순환이라는 거창한 개념은 차치하고라도, 약 10여 년의 간격을 두고 받은 주재원으로부터의 울부짖는 듯한 전화는 그 두 전화 사이의 기간이 별개로 떼어서 한 묶음으로 검토를 할만한 충분한 대상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성격 자체를 규정하기에 앞서서 그 시기를 서두의 영어 표현에서 힌트를 받아 객관적인 영어 느낌을 주는 ‘경제 위기 사이(Between the Economic Crises)’라고 부르기로 했다. 객관적인 시기 선정에 이어 ‘Between the Wars’에서 얘기한 것과 같이 1997년의 첫 번째 경제위기에 따른 변화와 그것들이 과연 어떤 식으로 현재의 위기와 연결되는가 그 인계선을 찾아보기로 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우리는 그 인계선을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자원, 즉 두 경제위기 사이의 한국인 라이프스타일 및 의식조사 결과를 주요한 텍스트로 삼아 찾고 분석했으며, 우리 사회의 주요한 사건이나 변화도 소비자로서의 한국인들에 미친 변화선상에서 선별하고 해석하였다.


민감해진 한국인의 미래는?


      그 해석의 결과 중의 하나로 우리는 “한국인은 ‘불황 민감성 체질’로 변해 왔다”는 것을 대표주자로 내놓았다. 꼭 실용적으로 필요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더욱 많은 첨단 기능에 점점 더 큰 것을 찾는 대형화 욕구까지 겹치니 당연히 같은 카테고리의 제품에 대해서도 더욱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했다.

 
       예를 들면 한때 몰락할 것이라는 평가를 듣기까지 했던 TV는 평면, PDP, LCD, LED 등으로 계속 기술적인 진화를 이루면서 더욱 고가품이 되고 있다. 냉장고도 양문형 냉장고가 대세가 된 지 오래이다.


        게다가 원래 쓰던 물품 이외에 새로운 제품들이 쏟아져 나와서 어느새 필수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98년을 생각해 보면 핸드폰 보유율이 20%대에 머물렀다. MP3플레이어와 디지털카메라는 10% 이하의 보급률을 보이고 있었고, 자동차 내비게이션은 시장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에 더하여 사회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자기 교육이나 자녀 교육 등에 들어가는 돈이 많아졌다. 교육비는 많은 가정에서 가장 큰 지출항목으로 자리를 잡았다. 98년 이후 소득은 2배 약간 못 미치게 늘었지만, 가계신용은 3배 이상이 늘었다는 사실이, 알게 모르게 돈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게 된 지난 10년간의 한국인들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한 변화가 바로 현재의 불황을 불러 온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상황을 심리적으로 더욱 증폭시키는 현상을 불러 왔다고 본 것이다.


        돈에 민감해지다 보니 돈을 둘러 싼 부정적인 사건이 많이 일어나고, 돈을 직접적인 소재로 하는 브랜딩 수사(修辭)가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88만원 세대’란 서글픈 용어가 특정한 나이의 세대를 넘어서 여러 세대를 넘나드는 실정이다.


        사회가 다원화될수록 그 계층이나 집단간의 분화도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다양성은 더욱 증가하나 양극점으로 수렴되어 가는 추세를 보인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P세대’ 외에도 여러 가지 독특하고 재치 있는 이름을 단 세대들이 나오고, 그만큼 우리 사회의 다채로운 면을 보여 주었으나 이 모든 것들이 결국 ‘88만원’처럼 몇 푼의 돈으로써 정의가 되는 시대가 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


        굳이 영국의 역사학자인 카(E.H.Carr)의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란 문구를 끄집어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처한 현재의 환경과 미래에의 예측을 담아서 과거의 한 시기를 정의할 수밖에 없다.

 
       지난 98년부터 2007년말까지의 시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붙인 것은 그 의미에의 동의 여부와 타당성을 떠나서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매우 효과적인 수사였다. 그러나 단기적인 효용성을 떠나서 그 브랜딩 수사가 제대로 된 브랜드로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바로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달려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대공황의 시기까지 황금만능, 사회적 불평등이 팽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도금시대(Guilded Age)’라는 표현에 ‘21세기형’ 혹은 ‘디지털형’의 접두어를 붙인 형태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렇지만 아직도 끝을 모르게 진행 중인 이 불황만이 오로지 당당하고 확실하게 자리 잡은 이 현실 속에서 지난 10년의 정의는 객관성의 그늘 속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다. 두 개의 큰 경제위기 사이에 낀 시대였다고. 그리고 궁색하게 ‘민감성 체질’이란 말을 슬며시 꺼내 놓는다. 그 민감성이 그래도 더욱 숨 가쁘게 돌아갈 앞으로의 시대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란 희망 섞인 예측을 변명처럼 늘어놓으면서…..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경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