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롯데 브랜드의 빛과 그림자

 

      롯데 그룹의 홈페이지에 가면 ‘1965년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신격호 회장의 첫 번째 모국 투자’로 1967년 롯데제과를 창립한 것을 롯데의 시작으로 얘기하고 있다. 롯데 브랜드의 원형은 그보다 20년을 거슬러 올라가 2차 대전 패전 후의 1948년 일본 도쿄에서 설립된 롯데주식회사에서 찾아야 한다.


        많은 대기업 창업주들이 그렇듯이 롯데의 신격호 회장도 기업브랜드로 수렴하여 활용할만한 요소를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 장남으로서의 가출 이야기는 정주영 회장과 비슷하다. 정주영 회장은 무모하다시피 한 추진력과 그의 자서전 제목처럼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며 부딪혀보는 저돌적인 남성형이라면 신격호 회장은 이학적인 지식과 문학청년의 감수성이 어우러진 요즘의 용어로 하면 테카르트(Tech+Art)를 한몸으로 구현하는 여성형에 가까웠다.


        가출이라는 출발점은 같았지만 이런 근본적인 성격과 관심사의 차이가 현대와 롯데의 사업 분야의 차이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주영 회장이 먹는 것과 직결된 쌀가게 점원으로 경제계에 발을 들여 놓은데 반해 신격호 회장은 군용 오일을 만드는 중화학공업 부문에서 사업을 시작했다는 점이 이후의 두 그룹의 행보와 관련해서 보면 상반된 것 같이 보여서 재미있다.


        초기 신격호 회장의 인생역정에서의 키워드는 신용, 곧 믿음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제 시간에 우유를 배달하는 자신의 성실함을 인정한 한 노인이 신격호 회장에게 6만엔을 주면서 사업을 해보라고 해서 군용 오일공장을 차려서 꽤 돈을 벌다가 미군의 공습으로 공장이 잿더미가 되어서 첫 번째 사업을 접게 되었다. 이어 바로 일본이 패망하고 그는 귀국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신격호 회장은 그에게 6만엔을 꿔주며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사업으로 이끌었던 노인에게 6만엔을 갚기까지는 귀국하지 않겠노라 맹세하고 재기를 위한 사업체로 머리에 바르는 기름종류인 포마드회사를 차린다. 포마드는 불티나게 팔렸고 신격호 회장은 그 노인에게 6만엔에 더해서 집까지 새로 사주었다고 한다. 1~2년 사이에 약속을 지켜서 극적인 효과가 떨어지고 싱거운 구석까지 있지만, 소를 판돈을 훔쳐서 나오며 나중에 소떼를 몰고 방북하면서 그 돈을 수십 배로 갚겠다는 약속을 지킨 정주영 회장의 이야기와 맥락이 닿는다. 


        잘 알려진 것처럼 롯데는 대문호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여성 샤롯데에서 따온 것이다. 신격호 회장이 원래 일본에 온 목적은 문학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런 한 때의 문학도로서 그 꿈에 기반을 두고 지은 롯데는 브랜드 네임 측면에서는 아주 잘 지은 이름이다. 신격호 회장 자신이 일생일대의 수확이라고 롯데라는 브랜드 네임에 대한 흡족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 롯데라는 이름은 문학작품을 기원으로 함으로써 품격이 우선 갖추어져 있다. 지혜와 미모를 함께 간직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매력적인 실체 원형이 있어 아주 구체적인 이미지를 자아낸다. 그러면서도 살짝 앞부분을 떨치는 변형을 가함으로써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장치를 갖추었다. 롯데가 조선인이 사주라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약점을 이겨내면서 일본 최고의 제과기업의 하나로 우뚝 서기까지 롯데라는 브랜드 네임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조선’이라는 떨쳐 버릴 수 없는 브랜드 요소를 극히 서구적이면서도 일본인에게도 별로 어렵지 않게 발음이 가능한 브랜드 네임으로 어느 정도 가릴 수가 있었다. 실제로 롯데의 라이벌 기업이었던 하리스라는 기업이 한국으로 수입을 빼돌린다는 편협한 국수주의에 기초한 공격을 퍼부었다. 이에 신격호 회장은 태어난 곳으로서의 한국과 자신이 경제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일본이라는 두 개의 조국론을 내세우며 치졸한 공격을 극복했다.


        롯데라는 이름 자체와 신격호 회장의 대응이 매우 훌륭한 점도 있었지만, 롯데의 앞서 나가는 공격적인 마케팅 기법이 또한 사주의 국적이나 경쟁의 치열함을 뚫고 후발기업인 롯데가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처음 추잉껌 시장에 뛰어들면서부터 신격호 회장은 ‘깨끗함-위생’을 롯데의 차별적 특성으로 잡았다.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위생관념에 철저하다는 인식을 소비자들에게 심어주면서 다른 군소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우뚝 솟을 수 있었다. 이어 그는 정식으로 롯데주식회사를 발족시키면서 대나무 대롱을 달아서 풍선껌의 오락성을 극대화하면서 대히트를 친다. 다른 풍선껌보다 더욱 즐거움을 주는 롯데라는 인식을 주는데 성공했다.


        이런 ‘즐거움’이란 롯데 브랜드의 요소는 일본에 컬러TV시대가 열리면서 국민적 오락기구로 자리를 잡은 TV에의 매우 공격적인 광고 집행과 ‘롯데가요앨범’과 같이 오락 프로그램에의 타이틀스폰서와 같은 적극적이고 다양한 마케팅 활동으로 한층 강화되었다. 1969년 기존 구단을 인수하면서 일본 프로야구에 뛰어든 것도 어찌 보면 그런 브랜드 강화 마케팅 활동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인이 사주인 기업으로 한국이라는 속성을 떨치려 일본인의 생활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려 한 특면도 있다. 그렇지만 롯데에게 ‘한국’은 태생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었다. 잠잠하다가도 언제든지 보통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폭발할 수 있는 위험물이었다. 그저 숨기려고만 애를 쓸 것이 아니라, 위험하지 않고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다른 각도에서 일본 소비자들이 보도록 유도하는 마케팅 활동이 필요했다.


한국 시장에 혁명을 불러 온 롯데 브랜드


        한국으로 진출한 롯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이라는 브랜드 속성이 일본에서의 ‘한국’처럼 뗄 수 없는 것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국에서도 서구적인 브랜드네임과 정부의 강력한 지원이 부정적인 방향에서의 일본색을 없애는데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감정적인 부분에서 일본을 싫어하긴 했어도, 비즈니스 측면에서 일본은 모든 부분에서 한국을 앞서 있었다. 국민들도 삼일절마다 일제의 만행을 증언하는 TV프로그램을 보며 적개심을 불태우다가도, 형편만 된다면 몇 배의 프리미움을 주더라도 일본제 제품을 사고자 할 정도로 이미 한국에서 일본제는 한국제보다 나은 고급 제품을 의미했다. 그런 후광효과를 롯데는 톡톡히 누렸다.


        그런 후광효과 위에 펼쳐대는 마케팅 분야에서 경쟁이 더욱 치열한 일본에서 산전수전(山戰水戰) 겪은 롯데를 한국 기업들이 당할 수가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도매점을 거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소매점으로 유통을 시키는 직판제를 실시한 것은 기존 기업들이 생각할 수도 없었던 한국 제과업계의 혁명적 사건이었다.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한국 여자 연예인들의 가장 권위 있는 등용문은 롯데가 자신들의 광고모델을 뽑는 ‘미스롯데’란 행사였다. 국가의 대표라는 무거운 왕관을 쓰는 미스코리아보다 훨씬 자유롭게 연예계로 직행할 수 있는 인물들을 선발하는 자리로 알려져 큰 인기를 끌었다. 광고모델을 선발하는 행사 자체로 전국민적인 관심과 인기를 끌고, 이미 인지도를 한껏 올린 인물들을 자사의 광고에 활용하여 역시 주의를 끄는 일석이조 이상의 ATL(Above-the-line : 주요 4대 매체 광고 중심의 마케팅 활동)과 BTL(Below-the-line : 4대 매체 이외의 이벤트, PR, 신규 매체 위주의 활동)이 어우러진 선순환의 마케팅을 롯데는 이미 70년대 말에 펼쳤던 것이다.


롯데 브랜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하여


        80년대 말에 취직한 직후에 거리도 가깝고 해서 롯데호텔에 근무하고 있던 선배들을 사무실로 찾아 갔던 적이 있었다. 비록 근무시간이기는 했지만 선배들이 너무 어렵게 윗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자리 비우는 허락을 맡는 것과 관공서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구식 철제 책상들에 놀랐다. 분위기와 조직이 아주 보수적이라는 얘기를 선배들이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건넸다. 선수협의회 결성을 주도했다고 롯데라는 브랜드를 당시 지탱하고 있던 한 축이자 롯데야구는 브랜드 그 자체였던 최동원 선수를 방출하다시피 하는 경직성이 롯데라는 기업 브랜드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제과 이외의 백화점과 호텔, 건설, 놀이공원 등의 분야에 진출하면서 샤롯데에서 출발한 롯데의 이미지 확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롯데에 심어져 있고 한국인 소비자들에게 잘 어필하던 서구적인 아름다움과 일본적인 아기자기함보다 롯데는 새로이 진출한 분야에서는 중후장대함이나 고급스러운 프리미움을 앞세웠다.


        일본과 한국의 경제력과 정보 격차가 줄어들면서 일본이라는 롯데 브랜드 요소의 마력이 떨어진 측면도 있다. 일본 롯데에서 오히려 최지우, 배용준, 보아와 같은 한류 스타들을 대거 광고모델로 기용하면서 롯데가 한국에 뿌리를 둔 브랜드임을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후장대 쪽으로 사업 확장의 방향을 잡다 보니 정권과의 결탁으로 뭔가가 구린 데가 있는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또 롯데에 덧씌워져 왔다. 제 2 롯데월드가 실제 어떤 영향을 비행기 운행에 주는 것이지는 모르겠으나, 정권이 바뀌면서 갑작스레 표면으로 떠오른 데는 롯데의 강력한 로비가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전의 4대문 안의 백화점 허용 등과 연결되어 롯데를 구성하는 이미지 요소의 하나가 되었다. 몇 차례 사고를 일으킨 롯데월드의 사후처리와 대응은 롯데 관계자들의 관심에서 소비자는 내부 최고위 경영자와 관련 행정기관보다 한참 뒤에 있음을 확연하게 보여준다.


        기업 브랜드 측면에서 롯데는 지난 20년간 안타까운 모습을 주로 보여주었다. 2008년 프로야구 롯데 구단은 최악의 구단이 최선의 팬을 통하여 어떻게 변신할 수 있는지, 그리고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그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활력소 역할을 할 수 있는  브랜드 요소를 가지고 있는 롯데가 새롭게 기업 브랜드를 잡아서 떨쳐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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