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나의 브랜드는 ‘미국 영주권’

나의 브랜드는 ‘미국 영주권’


예전 멀고 먼 옛날 80년대 중후반에 직접 겪은 일이다. 우리 아파트는 같은 동의 주민들끼리, 특히 당연하게 아주머니들끼리 아주 친했다. 자녀들도 대충 나이들이 엇비슷하게 많이 있었는데, 가끔씩 눈인사 이상으로 이야기도 나누고 어울리기도 할 정도였다. 그런데 대학을 막 졸업한 위층에 사는 어느 집 딸이 갑자기 결혼을 한다고 어머니께서 말씀을 지나가듯이 말씀을 하셨다. 별 생각 없이 흔히들 하는 질문을 여쭈었다. “신랑 될 사람은 뭐한대요?” “잘 몰라. 미국시민권자라고 하더라.” 갑자기 좀 어이가 없어서 부지불식간에 큰 소리로 되묻듯이 외쳤다. “아니, 미국 시민권자란 것이 직업이에요?!”


하긴 ‘재미교포 사업가’란 타이틀 하나로 통하던 시절이긴 했다. 미국 불법체류자로 나오는 안성기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이민국 관리들 앞에서 미국 국가를 부르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을 연기했던 1984년의 영화 “깊고 푸른 밤”에서, 진유영이 분했던 결혼하려는 처자에게서 온 전화를 받으려다가 강도의 총에 맞아 죽는 슈퍼마켓 종업원도 한국에서는 버젓한 재미교포 사업가였다. 그리고 신문에는 심심치 않게 ‘재미교포 사업가로 행세하며 수많은 여성 농락’ 따위의 굵직한 헤드를 단 기사가 나오곤 했던 시절이었으니, 딸 가진 부모에게 ‘미국 시민’이란 예비사위의 타이틀은 한국에서의 웬만한 직업보다 낫게 보였고, 정말 자랑스러웠을 수도 있다.


한미관계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해외여행객도 많아지고, 특히 미국에를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것을 신입사원이 본인소개를 할 때 특이한 점으로 얘기를 할 정도로 미국이 가까워지고 속속들이 알려지며 위와 같은 시절은 과거의 씁쓰레한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작년 어느 스포츠신문에 유명 연예인의 결혼을 알리는 기사를 보았다. 신랑을 다음과 같은 헤드로 소개하고 있었다.


“UC 버클리 출신 수재, 미국 영주권 가진, 재력가 가문의 금융 회사원”


캘리포니아 소재 버클리대학교가 좋은 학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바로 ‘수재’를 갖다 붙인 것은 어색하다. 최소한 한국의 대학교에는 학벌 등 민감한 문제가 개입될 여지가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대놓고 특정 대학교 출신이라고 ‘수재’ 와 같은 단어를 붙이지는 못할 것이다. 버클리 대학교를 들어갔다고 해서 수재라고 한다면 더더욱 우스운 꼴이다. 한국의 상위권 대학이 훨씬 들어가기 힘들다. 물론 출신 학교를 떠나서 정말 수재였을 수도 있다. 그럼 거기에 버클리를 굳이 앞에 붙인 것은 수재 본인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고, 버클리 대학교도 자신이 뱀다리처럼 놓여진 것 같아 불편할 것이다.


‘미국 영주권’은 왜 그렇게 밝혀야 했을까? 법적으로 미국인이라면 아직까지는 화제성이 있는 국제결혼인지라 밝혔다고 할 수도 있으나, 영주권을 굳이 밝히는 것은 다른 범인(凡人)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지막 부분은 ‘부(富)’가 최고의 가치로 자리를 잡고 있고, ‘부’를 이루었다는 자체로 모든 것이 용서되는 현재 우리의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한 대목인 것 같다. 그것도 졸부가 아닌 대를 이은 부자에 본인도 부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까지 결합시켜 보여 주었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은 아니지만, 몇 자 안되는 헤드로 기자는 ‘머리 좋고, 국제적인, 돈 많은’ 완벽 삼위일체 신랑의 모습을 그렸다. 해당 연예인의 소속사에서 신랑에 대한 보도자료를 그렇게 낸 것을 그대로 옮겼는지 여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우리 사회 전반이 지향하는 가치를, 어슴푸레 알고는 있었지만 꼭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을 보게 된 것이다. 특히나 ‘미국 영주권’이 그 절제되어 배치된 단어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은 이제는 그만 장기공연을 접었으면 하는 블랙코메디이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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