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은 저마다 자기의 풍경을 갖고 있다

 

      1998년 말에서 1999년 중반까지 삼성의 브랜드 슬로건 작업에 매달려 있었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활짝 열린 시점이었다. 디지털 이미지를 선점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디지털을 전면에 내세울 수 있는, 가장 노출도가 큰 슬로건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그 실무작업을 수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작업을 시작했을 때, 이미 많은 기업들이 아래와 같이 디지털을 직접적으로 그들의 슬로건이나 서브브랜드와 같은 형태로 사용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리고 비록 디지털이라는 단어를 슬로건 등으로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디지털을 바로 연상시키는 소재나 그림을 활용하는 기업들도 다수 있었다.

 

<1999년 초 유수 전자 기업들의 '디지털'의 커뮤니케이션 활용 현황>

기업

'디지털' 사용 예

사용 형태 및 특이사항

소니(Sony)

Digital Dream Kids

기업슬로건 형식으로 사용

MasterKey to Digital Life

소수 제품, 혹은 집합제품군에 사용

RCA

Think Digital

기업슬로건으로 사용

파나소닉(Panasonic)

Bridge of Digital Dreams

기업 슬로건으로 사용

Digital World

유통, 복수 제품군에 한정적 사용

샤프(Sharp)

Digital Dimension

태그라인(Tagline) 형태 사용

모토롤라(Motorola)

Digital DNA

부품 서브브랜드 형태

코닥(Kodak)

digital science

일부 제품군 서브브랜드로 사용
 

      삼성의 경우 1999년 중반에야 "Samsung Digitall everyone's invited"란 슬로건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전개하기 시작했는데, 디지털을 광고나 슬로건 등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 활용하는 것은 다른 경쟁사들보다 늦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디지털 시대를 선도하겠다는 의지와 그를 뒷받침한 연구개발 부문에의 투자와 집념에서 앞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슬로건을 모든 매체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소비자들에게 알림으로써 제품 부문에서의 성과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이미지를 획기적으로 개선시키는 다른 어느 경쟁자가 이룩하지 못한 기적과도 같은 성과를 일구어 냈다.

 

      슬로건이나 광고 카피의 핵심 키워드 등을 구상할 때, 다른 기업들에서 사용이 되었다고 하여, 획일적인 차별화의 잣대를 적용하여 지레 배제할 필요는 없다. "장자(莊子)"에 보면 '도행지이성 물위지이연(道行之而成 物謂之而然)'이란 구절이 나온다. '도(道)'와 '물(物)'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뜻은 직그히 평범한 것으로부터 매우 형이상학적으로 나뉠 수 있는데, 나는 가장 쉽게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갖다 붙여서 '길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만들어지고, 물건은 우리가 어떻게 부르는가에 따라 그렇게 된다'고 해석을 한다. 즉, 수풀만 우거진 곳, 아무런 표식도 없는 사막의 모래 위에 사람들이 오가면서 '초원의 길', '비단길'이 생성되듯이, 제품에도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여 이름을 붙여서 계속 그렇게 부르면 제품에 그 의미가 녹아 들고 발현된다는 것이다. '브랜드는 의지(意志)에 달려 있다'고 한 것은 바로 그런 뜻이었다. 물론 그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하드웨어가 함께 해야 하는 것은 당연이 전제되어야 한다.

 

      평론에서도 예술성 풍부한 글쓰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 한국의 대표적인 문학평론가인 고(故) 김현은 '자리매김'이라는 말이 싫다고 했다. 자리매김이란 관계맺기, 관계짓기보다 훨씬 고착적이어서, 한 번 자리가 매겨지면 변경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현은 "말들의 풍경"이란 그의 유고집에서 다음과 같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문장을 우리에게 남기고 갔다.

 

말들은 저마다 자기의 풍경을 갖고 있다. 그 풍경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다르다. 그 다름은 이중적이다. 하나의 풍경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풍경들의 모음도 그러하다. 볼 때마다 다른 풍경들은 그것들이 움직이지 않고 붙박이로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변화로 보인다. 그러나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말들이 갖고 있는 은총이다. 말들의 풍경이 자주 변하는 것은 그 풍경 자체에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풍경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자꾸 변화하기 때문이다. 풍경은 그것 자체가 마치 기름물감의 계속적인 덧칠처럼 사람들이 부여하는 의미로 덧칠되며, 그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마치 빛의 움직임에 따라 물의 색깔이 변하듯 변한다. 풍경은 수직적인 의미의 중첩이며, 수평적인 의미의 이동이다.

 

      사람들은 말들이 나름대로 자신만의 풍경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풍경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서로 다른 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또한 받아들이지 않는다. 말들은 그저 인간 자신이 정해 놓은 그 틀 안에서만 의미를 발현하고 머물기만을 원한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 자신이 정해 놓은 틀 속에 단어를 묶으려 할수록, 그 틀은 자신을 옥죄이는 도구가 될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이 처한 환경이 다르고, 말을 뱉어 내고 받아 들이는 상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내가 정한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겠는가?

 

      시대에 따라서 또한 당연히 단어의 의미와 쓰임새가 달라진다. 70년대 후반 당시 상당한 인기를 끌던 모가수가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TV에 출연하여 어머니께서 무척 아름다우시다는 사회자의 칭찬에 "네, 섹시하시죠"라고 한 마디 맞장구를 쳤다가 부적절한 용어를 사용했다고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고 TV출연을 자의반타의반 한동안 자제하는 등의 곤혹을 치른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요즘은 대상을 떠나 최고의 찬사 중 하나로 남용되다시피 하고 있다.

 

      '검둥이'와 같은 경멸조로 쓰는 단어라고 사전에 나와 있는 'Nigger(니거)'는 19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흑인을 지칭하는 통상적인 용어였다. 그런데 'Negro', 'Colored', 'Black'와 같은 다른 단어들이 나오고 가치중립적인 표현이라고 개발한 'African-American'이란 단어까지 나오면서, 거의 절대 써서는 되지 않는 인종차별적인 단어로 자리를 잡았다. 영화 '폴리스 아카데미 I'에서 조용한 흑인 거한 교육생이 교육용 차를 뒤집어 엎고 경찰학교를 나가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것이 바로 백인 교관의 입에서 나온 'Nigger'라는 단어였다. 그런데 우리가 친한 친구들끼리 서로 욕을 섞어 부르듯이 흑인들이 서로를 니거라고 부르고, 자연스레 랩에서도 표현이 되면서 힙합(Hip-hop) 흑인문화의 상징적인 단어 중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그러나 아직까지도 함부로 내뱉어서는 위험한 단어이긴 하다.
 

      이렇게 맥락, 말하는 이, 듣는 이,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단어는 기회이자 위협요소이기도 하다. 제한된 틀을 벗어나 다양함을 포용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제어할 수 없게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튀어 버릴 수 있다.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적절한 사용이 의도에 가깝게 소비자들이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해석을 하도록 유도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사람 사이 커뮤니케이션의 90% 이상이 비언어적인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한다. 광고에서 보이는 눈짓이나 제스추어 하나가 백 마디 카피보다 더 큰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보다 더 장기적이고 일관된 브랜드적인 관점에서 자신만의 소리, 냄새, 상징적인 시각적 기호나 색상, 촉감, 맛을 만들고 그것들을 소비자들이 느끼게 하는 오감 브랜딩이 각광받는 이유의 근원도 바로 한 곳에 머물려 하지 않는 단어의 특성에 있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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